등록 : 2017.11.08 21:44
수정 : 2017.11.08 22:01
남북을 선악으로 갈라
휴전선 가리켜 “감옥국가 시작
탄압받는 자들을 가르는 선”
북핵 아닌 ‘북한’ 자체를 조준
북-미관계 전망 불투명
‘북 붕괴론’에 기반한 대북인식
전문가 “북은 미국이 적대정책
변화없다고 받아들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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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미 대통령의 우리 국회 연설은 1993년 빌 클리턴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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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일 오전 국회 연설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각각 선과 악으로 규정하고, 격한 표현으로 북한을 비난했다. 또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북 체제를 철저히 고립시켜 북한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핵화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네오콘’의 인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휴전선’의 상징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휴전선을 가리켜 “오늘날 자유로운 자들과 탄압받는 자들을 가르는 선”이라며 “번영은 거기서 끝나고 북한이라는 감옥국가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또 “평화와 전쟁, 품위와 악행, 법과 폭정, 희망과 절망 사이에 그어진 선”이라고도 했다. 휴전선의 남쪽은 ‘자유와 정의, 문명과 성취’로, 그 북쪽은 ‘압제와 파시즘, 탄압과 사악함’으로 규정한 종교적 이분법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이자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비난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럴 경우 정책의 초점은 ‘북핵 문제’가 아니라 ‘북한’ 자체에 맞춰지게 된다.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대북 정책 기조로 제시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 온통 ‘압박’에만 집중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그는 “책임있는 국가들이 힘을 합쳐 북한의 잔혹한 체제를 고립시켜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북한을 지원하거나, 받아줘서는 안 된다”며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국가들에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격하시키며 모든 무역과 기술관계를 단절시킬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최고존엄’도 직접 겨냥했다. 그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북한 독재체제 지도자’로 지칭하며 “당신이 획득하고 있는 무기는 당신을 안전하게 할 것이 아니라 체제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북한은 당신 할아버지가 그리던 낙원이 아니다. 그 누구도 가서는 안 되는 지옥”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잔혹한 독재자, 폭정, 군사적 컬트집단, 감옥국가, 지옥’ 등 격한 표현을 숱하게 등장시켰지만, ‘화염과 분노’ ‘북한 완전파괴’ 등 군사적 행동을 암시하는 언급은 피했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과 한 공동기자회견에서 ‘북-미 직접대화’ 가능성에 대해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고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도 실낱같은 대화 가능성을 거론했다. 다만 조건부다. 그는 김 위원장을 겨냥해 “당신이 지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빛과 번영과 평화의 미래를 원한다. 핵 악몽이 가고 아름다운 평화의 약속이 오는 날을 꿈꾼다”고 말했다. 다만 “그 출발은 공격을 중지시키고, 탄도미사일 개발을 멈추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총체적 비핵화”라고 말했다. 북한의 ‘선 비핵화’가 대화의 전제조건이란 뜻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붕괴론’에 기반한 대북 인식을 갖고 있으며, 대북 정책도 ‘최대한 압박→북한 굴복→관여(대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라며 “과거에도 실패한 정책의 조합으로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북-미 관계에 대해 낙관적 전망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9월15일을 끝으로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이를 ‘사실상의 모라토리엄(시험·발사 유예)’으로 규정하고 국면전환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던 전망도 어렵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남북관계 전문가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대화를 안 하겠다는 것이라면, 트럼프 행정부는 북 체제를 부정하고, 지도자를 강도 높게 비판·모욕하는 것으로 대북 압박 강화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라며 “역으로 북한으로선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확인한 셈이어서,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할 명분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변화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라며 “선 평화체제-후 비핵화라는 기존 입장을 다시 들고나오면서 북한은 미국과 맞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무력시위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정인환 김지은 노지원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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