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29 17:41
수정 : 2019.04.3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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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의료계 기자회견에서 최원영 간호사(왼쪽에서 세번째)가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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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낙태법 논란이 한창이지만 낙태가 좋은 것이니 국민들이 더 많이 하게 하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헌재의 결정으로 내년 말까지 개정해야 하는 낙태법에는 국가가 어떤 지원을 해서 우리 국민들이 낙태의 위험을 피하게 할지에 대한 대책이 담겨야 한다. 낙태를 해서 더 건강해지는 여성은 없다. 이번에 여성의 성 건강을 최우선으로 보호하고 사회적, 경제적 압력에 의해 낙태당하는 국민이 없도록 국가 지원 체계를 확립한다면 수십년간 논쟁만 하고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던 우리의 낙태 문제에 전기가 될 수 있다. 이에 입법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첫째, 합법 낙태는 여성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기준을 정하고 반드시 건강보험이 적용돼야 한다. 낙태는 임신 주수에 따라 방법과 위험이 크게 다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평균 낙태 시기는 6.4주이고 8주 이하가 84%, 12주 이하는 95.3%다. 임신 주수는 초음파로 아기 크기를 재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낙태가 비교적 안전한 시기는 임신 8주 이내다. 그 뒤로는 2주마다 모성 사망 위험도가 2배씩 증가하므로 합병증 위험을 낮추려면 초기에 해야 한다. 또 10주부터는 염색체 검사로 성감별이 가능하다. 남아선호사상은 약해졌지만 원하는 성별을 골라서 낳고 싶은 부모의 욕망이 사라지긴 어렵다. 임신 초기라도 사유의 제한 없이 낙태하게 하면 성감별에 의한 낙태도 증가할 것이다. 중기 낙태는 분만보다 위험하며 20주 이후에 아기를 낳는 것은 낙태가 아니라 조산이다.
그런데 수많은 논쟁 끝에 낙태 허용 기준을 어떻게 정하더라도 국민들이 지금처럼 지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어디까지 허용할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 준수에 대한 확인 절차다. 어떤 사유로 임신 몇주에 얼마나 낙태하고 어떤 합병증이 생기는지 등 실태를 파악하려면 우리나라 의료제도상 건강보험 진료여야 가능하다. 현재도 합법 낙태는 건강보험 대상이며 임신 주수별로 급여 수가가 정해져 있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통해 정부는 위기 임신에 처한 국민들이 낙태보다 출산을 선택하는 게 개인이나 가정에 득이 되도록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낙태 전 상담 절차와 숙려기간을 필수로 해야 한다. 낙태 전에 충분한 정보 제공과 지원 없이 낙태만 쉽게 하게 하는 건 여성의 권리 보호가 아니라 방치다. 사회적 상담을 통해 임신을 유지하면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주고 경제적 문제면 경제적 지원을 하고 사회적 압박이면 이를 막아주는 지원을 정부가 해야 한다. 또 과도한 불안이나 주위의 강요에 의해 낙태하지 않도록 심리 지원을 하고 시술자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낙태 시술 과정과 합병증에 대한 의료 상담을 받은 뒤 충분한 숙려기간을 거쳐 여성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낙태한 뒤 그 과정을 알고 나서 그런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라는 여성도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조사에서 낙태한 여성의 약 97%가 의료적, 심리·정서적 상담과 출산·양육에 관한 정부 지원 상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마다 다양한 낙태 승인 및 상담 제도와 숙려기간을 두고 있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등에서 낙태 전 상담을 의무화하고 있고 프랑스는 8일, 이탈리아는 7일의 숙려기간을 두고 있다. 또 네덜란드처럼 낙태법에 그 누구도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명시해야 한다.
셋째, 아버지의 양육 책임을 법제화해야 한다. 남성은 부양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바꾸지 않고 낙태 허용 범위를 넓히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낙태의 위험으로 내모는 것이다. 덴마크, 캐나다, 영국, 미국 등 낙태율이 낮은 나라들은 양육비를 안 주면 월급과 재산을 압류하고 운전면허나 여권 정지뿐만 아니라 벌금, 구속 등 강력히 처벌한다. 많은 이가 피임 교육을 제대로 하자고 하지만 교육열이 지구상, 역사상 으뜸인 우리 사회가 그동안 피임의 중요성을 몰라서 교육을 안 한 게 아니다. 피임 안 한 결과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니까 교육도 제대로 안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료인의 낙태 거부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낙태가 불법이어도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합법이 된다고 여성과 태아의 건강을 지켜야 할 의사에게 비의학적 사유의 낙태를 하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 의료법상 의료인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낙태를 포함해야 한다. 또 낙태가 여성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낙태하는 병원으로 안내할 의무를 부과해서도 안 된다. 낙태에 대한 편의는 정부가 의료기관과 별개의 시스템으로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산부인과 의사는 수련과정에서 계류유산이나 사산된 아기를 유산하는 것을 배운다. 기본적으로는 낙태와 같은 술기다. 이렇게 산부인과 의사가 된 뒤 낙태를 하고자 하는 의사에 한해서만 낙태 교육을 하고 시술을 승인해서 일본처럼 지역별로 지정된 의사만이 낙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낙태가 법적으로 안전해지더라도 의학적으로는 낙태를 안 하는 것이 여성에게 가장 안전하다. 의학의 발달로 미래에는 낙태 안 해도 되는 세상이 분명히 올 것이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도를 만들어보자.
최안나
국립중앙의료원 난임센터장·산부인과 전문의
[이슈논쟁] 낙태죄 폐지, 그 이후
헌법재판소는 지난 11일 임신중지(낙태)를 하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한 낙태죄 처벌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현행 처벌 조항이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함에 따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에 따라 내년 말까지 관련법 개정도 이루어져야 한다. 낙태죄를 둘러싼 오랜 논란이 일단락되었지만, 정치권과 여성계, 의료계 등 안팎에선 향후 추진될 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한층 더 뜨거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여당도 일단 법안 발의를 서두르는 것보다는 사회적 공론 형성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산부인과 전문의 고경심·최안나의 기고를 통해 예상 쟁점을 미리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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