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3 17:47
수정 : 2019.07.23 21:07
1960년대 중반까지 ‘친일파’라는 단어는 대중적이지 않았다.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가 일제에 협력한 이를 규정하는 친숙한 말이었다. 1949년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와해하고, 한국전쟁으로 남북 대결이 격화하자 친일파는 빨갱이 잡는 반공 투사로 ‘개념 변신’에 성공했다.
주류 행세를 하던 친일파를 다시 소환한 건 임종국(1929~1989) 선생이다. 문학연구자였던 그는 1956년 <이상 전집>을 쓰면서 자료 수집 과정에서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의 ‘반민족성’은 그를 아예 친일파 연구자의 길로 내달리게 했다. ‘이완용이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8개월 만인 1966년 발간한 <친일문학론>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김동인, 노천명, 이광수, 모윤숙, 정비석, 이효석…. 문학계 거물들이 ‘내선 일체’ 등을 부르짖던 친일파라는 걸 고발했다. 초판 1500부 가운데 발간 첫해 팔린 건 겨우 500부. 완판까지 13년 걸렸다. 되레 당시 대학생들조차 “문학으로 일본과 친선하자는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 등으로 친일파 연구를 확대했다.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친일논설선집>(1987) 등을 발간하며 친일파의 실체와 죄상은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파 총서’를 기획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989년 타계했다. 그의 빈소에서 유지를 잇겠다 다짐한 이들이 91년 민족문제연구소를 창립했다. 학술대회, 출판물 등을 통해 친일파 청산을 시대적 과제로 끌어올렸고, 2001년 12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2008년 박정희를 비롯한 4776명의 친일파 명단을 선정하자,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은 편찬자들을 “종북주의자, 반역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은 세상에 나왔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친일파’라는 단어를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세웠다. 그 부끄러운 낙인을 피하려 온갖 항변이 쏟아진다.
신승근 논설위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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