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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31 05:00 수정 : 2019.08.01 18:08

지난 25일 도쿄의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희 논설위원의 직격인터뷰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

일부 반한·반중 의식은 일본의 ‘자신없음’ 발현
전후 일본, 정면으로 과거 맞서지 못한 탓 크다
독일처럼 일본은 도쿄에 위안부상 왜 못세우나

국가간 관계개선만은 한계, 시민교류로 평화조성을
아베노믹스 실업률 낮췄지만 비정규급증 등 문제
개헌선 저지는 의미, 50%미만 투표율 등 위기감

지난 25일 오후 4시, 일본 도쿄 분쿄구에 있는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의 ‘도쿄시민법률사무소’ 문을 두드렸다. 전날 오전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비행기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만 하루 남짓. 국내 취재와 다름없는 물리적 거리다. 그렇게 일본은 가깝다. 하지만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오래된 표현이 요즘만큼 절실한 때도 없다. 이번주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가능성이 점쳐지며 양국간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본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며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지식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일본변호사연합회의 회장을 맡던 2010년 12월 한국의 대한변호사협회와 함께 공동선언을 내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등의 피해 구제 및 회복을 위한 조치에 나설 것을 한일 양국 정부에 촉구한 바 있다. 지난주 <한겨레21>에 실린 강제징용 문제 관련 기고는 독자들의 큰 반향을 얻었다. 그를 찾은 건 이번 사태의 배경과 해법과 함께 근본적으로 일본 사회가 어떤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있고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어서였다. 일본이 한국을 모르는 만큼이나 한국 또한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우쓰노미야 전 회장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선 “한국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말하기보다 피해자 구제를 제일로 놓고 한일 정부, 그리고 일본 기업이 무엇을 할수 있을지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국가간 관계개선만으론 한계가 있다. 시민간의 교류가 평화적 환경 조성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말들을 한다.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직접적 계기는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지만, 지금의 일본 정권이 전후 어떤 정권과 비교해서도 극히 보수적·우익적인 탓 또한 크다. 전후 일본 정권의 특징은 2차대전 전의 식민지지배나 침략전쟁의 가해책임과 정면에서 맞서지 못한 것이었다. 1993년 고노담화나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 때는 그런 공기가 바뀔까 기대했지만, 다시 원래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면 한국 문재인 정권은 이전의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비교해 지극히 민주적이고 리버럴한 정권이다. 정반대로부터 대립하는 듯한 성격의 정권이 양국에 있는 것도 큰 배경이라 본다. ”

한국에선 강제징용 문제뿐 아니라 일본의 무역보복엔 다른 여러 노림수가 있다고도 본다. 참의원 선거는 끝났지만 선거전략이라든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또는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못마땅해하기 때문에 같은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보나.

“기본적으론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페널티, 대항조치로 본다. 일본정부도 처음엔 그런 설명을 하는 듯 하다가, 그러면 WTO 위반이 되어버리자 급하게 설명을 바꿔 전혀 관계없는 문제를 꺼내들었다. 정권도 그렇지만 최근의 일본 사회나 미디어에 반한·반중 같은 기운이 상당히 퍼진 것과도 관계 있다. 지극히 보수적·우익적 층이 아베 정권의 강한 지지기반이고 그에 대응하는 정책을 펴는 것으로 정권의 구심력을 유지하는 게 지금의 특징이다.”

―일본 내 반한·반중 인식 같은 게 나타나는 건 왜인가.

일본이 세계 제3위 경제대국이라곤 하나 버블경제 붕괴 뒤 ‘잃어버린 20, 30년’으로 불리며 경제도 상당히 침체하고 사회적으론 빈곤과 격차가 커지는 등 ‘지반침하’가 현저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라 더욱, 전전과 다른 국가로 힘을 키우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대항감, 내가 보기엔 일본의 ‘자신없음’이 거꾸로 뒤집혀 발현된 것 아닌가 싶다. 동시에 ‘일본은 훌륭하다’ 같은 논조가 언론에선 눈에 띄게 지배적이다. 과거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한국·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어가는 자세의 결여가 이번 무역보복과 같은 조치를 가져온 거다. 일본이 훌륭하다든지 한국과 중국을 비난하는 게 속시원한 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일본 내 번져가는 빈곤과 격차라든가 경제전체의 침체 같은 문제에서도 눈을 돌려버리는 일이다.“

―말하셨듯 강제징용 문제의 근본에는 20세기 전쟁과 식민지지배 불법성에 대한 인식의 차가 있다.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종전 40년을 맞아 1985년 5월8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했던 ‘황야의 40년’이란 유명한 연설이 있다. “문제는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뒤에 와서 과거를 바꾼다든가 일어나지 않은 일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눈을 닫는 사람은 결국은 현재에도 맹목적으로 됩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다시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수도 베를린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나치에 희생당한 600만 유대인 추도 모뉴먼트를 세운 것도,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 아들·손자세대에까지 독일인이 잘못한 것을 전하겠다는 독일인의 결의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독일은 당시 강제수용소에 수감했던 동성애자나 장애인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도 계속 지불하고 있고, 주변국과 역사교과서를 함께 만드는 활동도 한다. 그런데 일본은 서울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한국이 철거 약속을 안 지킨다느니 같은 말만 한다. 독일의 대응식이라면, 일본 도쿄의 가스미가세키 국회 앞에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일본국 ‘위안부’상을 세워야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는 이것만으로 끝내고 싶다, 손자에게도 죄책감을 전해선 안된다는 듯한 말만 반복한다. “

―그렇게 된 이유는 뭔가. 개인적으로 일본은 ‘종전’은 있지만 ‘패전’은 없는 사회였다라고 생각하는데.

“독일은 뉘른베르크에서 연합국에 의해 나치 전범 재판이 이뤄졌을뿐만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서도 계속됐다. 검사청 아래 설치된 나치범죄추궁센터는 지금까지 10만7천명 이상 용의자를 조사해 7천명 이상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반면 일본은 도쿄재판만으로 끝났다. 끝났을뿐 아니라 전범과 기시 노부스케라는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 같은 이는 부활해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대신까지 했다. 여기엔 ‘천황제’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쟁에서 일본인 310만명이 죽고 아시아인 2천만명 이상이 죽었다. 그런데 미국과의 일종의 거래를 통해 상징천황제를 남기며 최고책임자였던 전전의 천황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일본의 민주화를 애매한 형태로 만든 측면이 있다. 또하나,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해 시민들이 싸워 인권을 획득한 한국과 달리 일본 헌법은 인권은 인정하지만 패전의 결과 주어진 헌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이나 자유, 민주주의가 충분히 정착한 사회가 되지 못했고, 지금의 아베 같은 정권을 탄생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불충분함에 대해 일본 사회 전체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잘 안되고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등 일본국민이 피해를 입은 점은 모두 배우지만 가해책임에 대해선 교과서에서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 분명 가해책임을 모두 배우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아시아 각국, 아시아인들과의 우호·연대는 구축되기 어렵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오월어머니집에서 받은 걸개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중국과도 경우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1991년 야나이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의 답변을 포함해 일본정부는 일관되게 개인의 청구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07년 4월 중국인 강제연행 피해자가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냈던 소송에서 같은 판단을 했다. 재판 자체는 패소했지만 청구권을 인정했기에 니시마쯔 건설은 피해자에게 화해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지금은 신일철주금, 미쓰비시가 돈을 내는 걸 정부가 막는 상황이다. 개인의 청구권은 존재한다 했고,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당연한 판결이라고 변호사로서 생각하므로, 기업이 지불하려는 걸 억제하는 건 해선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과 다르다는데 같은 문제다. 피해자의 인권구제라는 건 같은 대응을 하는 게 맞다. ”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지금까지 견해를 뒤집은 건 일본 정부 아닌가.

“한국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금방 아베 총리가 의회에서 모든 게 끝난 문제라고 설명하고 고노 외상은 ‘폭거’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표현 자체가 삼권분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대법원과 정부의 판단을 완전히 섞어버린 거고. 이를 이해못한채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와 똑같은 생각만 하는 학자나 전 주한대사 같은 사람만 불러낸다. 본래라면 민주주의사회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게 바람직하고, 법률의 해석엔 다른 생각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정부와 최고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고 했던 판단과 지금 태도가 다른데 이런 부분까지 자세히 보도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심각한 건, 강제징용 문제가 무엇인지 그 자체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보도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강제징용 피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어디까지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의 권리가 회복되도록, 피해가 회복되도록 하는 걸 제일로 해야 한다. 국가간 처리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될순 없는 거고, 피해자를 무시했던 해결은 애초 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1965년 당시 한국 정부가 제대로 하려했다면 먼저 철저하게 실태조사를 했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조사하고 당사자들이 납득할수 있는 해결을 해야 하는 건데 피해자를 제쳐두고 국가 간에 적당히 배상금액을 정했다는 처리방식 자체가 가장 큰 문제를 품고 있다. 변호사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은 한국이 일본을 대상으로 뭔가를 말하기보다 먼저 피해자의 구제를 제일로 놓고 피해자가 납득할수 있는 해결, 또는 지원을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어떻게 힘을 모을수 있을지 특히 가해자인 일본기업이 어떻게 노력을 다해야할지 힘을 합쳐 풀어나가야 한다고 본다. 일본에선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정책에 대해 고이즈미 당시 총리가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급한 바 있는데, 최근엔 그 가족들의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도 인정해야 한다는 지방법원 판결이 나왔다. 참의원 선거기간 아베 총리가 사죄하고 며칠 전엔 그 가족들을 직접 관저로 불러 사죄했다. 이런 걸 국내 한센병 피해자에게 한다면 강제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죄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데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했지만 하면서도 피해자들에 대해 패소판결을 해 ‘구제없는 권리’만 인정한 것이란 비판도 있다. 한국 강제징용 문제도 중국과 같은 형태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

“배상 청구권은 있지만 시효나 제척기간의 이유를 댄거다. 청구권이 있으니 기업이 돈을 내는 건 전혀 문제가 안된다. 그 판결 속에 화해를 추진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시효 문제도 어떤 형태든 클리어시켜 배상판결을 낸 것이다. 따라서 그 판결을 존중한 위에서 양국정부와 일본기업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베 정부의 성향도 있지만 일반국민들 사이 한국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 한계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와 최근의 강제징용에 이르며 ‘일본도 나름 해왔는데 언제나 모자란다는 비판을 듣는다’는 불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본인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웃음) 아까 말했듯 역시 전후 교육과 반성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일반 시민 차원에선 한국드라마나 케이팝 붐으로 친밀함을 느끼는 이들이 늘지 않나 본다. 다만 하나,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미친 영향은 있다. 그동안 일본은 늘 식민지지배나 전쟁책임에 대해 물음을 당해오는 입장이었는데 이건 피해자가 된거다. 물론 납치문제와 전쟁책임은 완전 다른 문제지만 분위기가 바뀐 계기가 됐다. 단순히 한국에 대한 불만 같은 차원은 아니다. 특히 납치문제에 대해 일본 내 리버럴이나 좌익세력은 처음엔 사실무근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이 인정하고 몇명을 돌려보냈다. 그 문제가 상당히 리버럴층을 동요시킨 측면은 있다.”

―한국에선 불매운동이 거세지고 반일의식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 한·일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할까.

국가와 국가 관계만의 개선이라면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시민차원의 관계 개선이 어느 정도 확산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서로의 나라, 역사를 잘 아는 것의 확산이야말로 평화적 환경을 만드는 데 관건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2005년 다중채무자 문제에 대한 조사를 위해 한국을 간 게 첫 방문이었는데, 이후 자주 가면서 한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도 그런다. 그래도 지난해 <택시운전사> 주연배우들이 일본에 오고 <1987>이 올해 개봉하고 <엔에이치케이>가 6월 비에스(BS)에서 <시민은 군과 싸웠다>라는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며 일본에서도 아 한국에서 이런 운동이 있었구나를 새삼 알게 된 사람들이 늘었다. 사실 일본의 리버럴층,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 시민운동은 굉장히 뒤쳐졌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말하면 ‘처음 알았다’라고 한다든지.”

―일부에선 불매운동이나 반일의식 확산이 시민차원의 교류나 이해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하던데.

“별로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지금 가면 뭇매맞지 않나’ 그런 걱정을 하는 것 아닌가. 실제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위기감 느껴지나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물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중첩돼있고 교류하는 데 좀 신경쓰게 되는 측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한국인들이 강렬하게 하는 게 일본인들로 하여금 ‘왜 한국인들이 저 정도로 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오늘 (한류거리라 불리는) 신오쿠보거리에도 가봤지만 젊은세대는 별 영향이 없는 것 같더라. 정확히는 한·일 갈등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반면 지난해말 일본정부가 매해 실시하는 주변국 친밀도 조사를 보면, 특히 50대 이상에서 한국에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비율이 굉장히 높다.

“글쎄. 하지만 젊은 세대는 보수적이고 아베에 대한 지지율도 높다. 경제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비판적 시점을 가질수 없게 하는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이 있다고 본다. 오히려 아베 정권의 개헌에 반대하는 층은 역시 시니어세대, 고령자층이다. 이들은 전쟁 경험도 있고 부모로부터 전쟁의 비참함도 들어서 ‘반전’이란 면에서 평화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이 높다. 전쟁 경험자가 점점 줄어들며 반전·평화 측면이 약해지기는 하고 있지만. 다만 앞에서 말했듯 리버럴층이 북한의 납치문제에 무너진 면이 있다고 본다.”

―강제징용 문제가 여기까지 온 데는 일본 변호사들과 일본의 양심적 시민세력의 지원의 힘이 컸다. 특히 2010년 일본변호사연합회와 대한변협의 공동성명에도 최근 주목받는 강제징용 관련 논거들이 이미 다 망라돼 있다. 일본 안에서 이견은 없었나.

“2010년 공동성명은 내가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되기 전부터 당시 김평우 대한변협 회장과 개인적 인연이 있어 마음이 통했다는 점과 당시 양국 변호사회에 전후보상·배상에 대해 검토하는 위원회가 각각 있어 공동 심포지엄을 연 게 계기였다. 최종적으론 일본변호사연합회 이사회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정부간 조약이나 국제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어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변호사법 1조에 변호사의 사명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어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가 침해당한 인권을 회복한다는 면에선 일치 가능하지 않냐는 점에서 이런 공동성명과 제안에 이르게 됐다.(*두 단체는 공동선언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에 관한 제언>도 냈다). 2010년 공동선언을 냈을 땐 일본은 민주당 정권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더욱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다음해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정부의 최대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다른 과제를 소홀히 할수밖에 없게 된 건 안타깝다. 하지만 9년 전 이런 선언을 낸 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회연합회 회장이 <한겨레>와 지난 25일 인터뷰하는 모습.
―침해당한 인권 회복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결국은 한국인의 편에 서게 되는 셈인데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나.

“나 자신은 그런 압력 같은 건 받은 적 없다. 사실 폭력적인 사금융업자와 계속 맞서왔고, 옴진리교 피해대책 변호단장을 맡아 종교단체와도 맞서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 압력받아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지만.(웃음) 다만 4~5년 전부터 헤이트스피치(혐오구호)가 도쿄의 신오쿠보나 오사카의 쓰루하시 같은 곳에서 일어나 재일조선인 등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 한-일 관계가 악화된 시기는 여러번 있었지만, 일본 내 헤이트스피치나 반한 인식 같은 게 배경에 작용한 건 거의 처음이다. 일본사회가 더욱 이런 경향으로 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일본사회 안에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가 더욱 정착할까 아닐까가 관건이다. 헤이트스피치가 있는 반면 거기에 대항하거나 한국인·중국인 피해자를 지원하는 변호사그룹 등도 있다. 국가 차원에선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이 나왔고 최근 가와사키에선 헤이트스피치 벌금조례안도 제안됐다. 헤이트스피치가 횡행한다지만 그에 맞서 ‘그건 인권침해고 문제’라는 운동 또한 상당히 번져가고 있다. 결국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과 한일 시민간의 교류가 번져 서로의 나라의 문제를 배우고 만나는 기운이 형성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에 특파원을 파견한 일본 미디어는 한국에서 지금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기보다 반한 또는 혐한에 연결되기 쉬운 정보만 전달한다.”

―한국에선 일본 청년들은 취업에 문제가 없다며 아베노믹스가 성공했다는 보도가 많았는데.

“실업률이 떨어진 건 맞지만 문제는 아베 정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조사에서 2162만명으로, 제2차 아베정권이 출범하던 2012년 당시 1800만명 정도에서 360만여명이 늘었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4할 가까이가 고용 불안하고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선 연봉 200만엔 이하 노동자가 12년 연속 1천만명을 넘고 있다. 일본은 1997년 노동자 임금이 제일 높았는데 그 이후엔 계속 실질임금은 낮아지고 있다. 반면 기업 내부유보금은 2012년 340조엔에서 2017년 446조엔으로 늘었다. 사회보장은 삭감돼 료연금·개호보험의 부담은 늘고 지급액은 감액되고 있다. 총체적으로 국민의 생활은 살아가기 어렵게 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베노믹스가 그리 성공이라 할순 없다. 다만 자주 인용되는 게 민주당 정권 때보다는 좋다는 거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은 2008년 리만쇼크로 대량의 파견직 해고가 있던 바로 다음해 탄생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재원에 대한 대책 마련 등 정책 실패도 상당히 있었다.”

―최근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인 3분의 2는 되지 못했지만, 결국 헌법개정논의가 본격화되는 건 아닌가. 평화헌법 9조는 그대로 두고 다른 조항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개헌을 모색한다는 관측도 많다.

적어도 3분의2는 안됐기 때문에 예를 들어 가을 임시국회에서 금방 발의해서 아베 총리가 공언한대로 2020년 헌법개정으로 쉽게 가는 식은 되지 않을 거다. 물론 국민민주당 등을 설득하거나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어 방심은 안되지만. (*실제 이날 일본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개헌논의에 ‘화답’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커졌다) 그래도 이전엔 자민당과 공명당 일본유신회 만으로 발의가 가능했던 데 비하면, 이번 참의원 선거로 개헌문제가 한걸음 후퇴한 건 틀림없고 의미가 있다. 심각한 건 투표율이 50% 미만이었는데, 국민 2명 중 1명도 투표하지 않는 사회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가 그런 위기감이 든다. (*최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18살 투표율은 34.68% 19살은 28.05%였다) 민주주의의 다리와 허리가 굉장히 약해졌다. 개헌 문제는 교육무상화 등 같은 걸 첨언한다는 식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아베 총리는 그런 데 익숙하게 해서 결국은 9조를 바꾸는 데까지 가려고 할 것이다. 그게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아베정권이 되어 좋은 점은 국민들이 헌법이나 입헌주의에 대해 조금은 더 공부를 하게 됐다는 점이다. (웃음)”

도쿄/글·사진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소설 <화차> 등장인물 모델된 ‘싸우는 변호사’

“한국 시민운동 알리고싶어 3년째 한국어 배운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3.1운동 100년을 특집으로 다룬 <주간 금요일>을 보여주고 있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의 도쿄 사무실엔 올해 찾아갔던 광주 ‘오월 어머니 집’에서 받은 기념품이 개헌반대, 히로시마 평화 포스터 등과 함께 걸려있다. 그만큼 그가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1946년 태어나 도쿄대 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고금리 사금융에 따른 다중채무 피해자 전문 변호사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그를 취재해 대표작 <화차>에 등장하는 개인파산 전문 변호사 미조구치 고로를 그려냈다. 소설에서 미조구치가 하는 말은 우쓰노미야 변호사가 미야베 미유키에게 직접 해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사금융 피해자의 변호를 맡으며 그는 자연스레 반빈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7년 반빈곤네트워크 대표를 맡았고, 다음해 연말 일본에서 큰 사회적 주목을 받은 히비야공원 내 실직 노동자를 위한 천막촌 ‘해넘이 파견마을’의 명예촌장도 맡았다. 시민단체의 추천으로 2012년과 2014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사건 당시 피해자 변호단단장, 헤이트스피치에 반대하는 노리코에네트워크의 공동대표 등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그의 삶을 한마디로 한다면 ‘싸우는 변호사’다.

“한국 시민운동에 대해 좀더 알리고 싶어” 3년 전부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의 역사나 개혁정책에 대해 잘 아는 듯 했다. 일본의 독립언론 <주간 금요일>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그는 3.1운동 100주년을 특집으로 다뤘던 잡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개혁에 관심이 많다며 이야기하다가 ‘찾동’(찾아가는 동사무소)이라는 단어까지 정확히 말할 땐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요즘 <한국 시민운동을 배운다>라는 책을 쓰고 있다고도 말했다. 도쿄/김영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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