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1 18:25
수정 : 2019.10.0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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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6월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자이니치 타운인 사쿠라모토에서 헤이트시위대에 맞선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시위를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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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 우익들의 대량 징계청구로 자이니치(재일동포) 변호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대한변협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지난여름을 달군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 보복 및 한-일 갈등 문제가 상대적으로 한국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요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720명의 우익에 맞서 재판을 벌이는 어느 자이니치 변호사를 이메일을 통해 만나본 이유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활동하는 송혜연 변호사와 동료인 일본인 변호사 간바라 하지메 앞으로 대량의 징계청구가 날아든 것은 2년 전이다. ‘여명삼년시사일기’라는 혐한 사이트의 주도로, 당시 일본변호사연합회엔 직전 해의 40배가 넘는 13만건의 징계청구가 접수됐다. 일본에 대해 ‘이적행위’를 한다는 등의 명분으로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금 중단을 비판하는 성명을 낸 단체 임원, 자이니치 이름을 가진 변호사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3천건이 넘는 송 변호사는 가장 많은 징계청구를 받은 이들 중 하나다. 가와사키시에서 열리는 혐한 시위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소송의 대리인을 맡았던 탓에 그와 간바라는 주요 타깃이 됐다. 1천명에게 ‘허위고발죄에 해당하고 위법한 징계청구는 손해배상청구 대상이 된다’는 편지를 발송했다. 잠잠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초 이 중 720명이 이들에게 7억2천만엔짜리 소송을 제기했다. “보낸 편지가 협박이라는 이유, 간바라 변호사에겐 트위터에 대량 징계청구를 비판해 명예훼손과 모욕을 했다는 이유까지 더해졌다.”
최근 몇년 새 가와사키는 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혐오·차별 발언) 싸움의 최전선으로 떠올랐다. 식민지 시절, 일찍부터 수많은 조선인이 건너갔던 공장지대이자 2차 대전 말기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끌려갔던 지역. 1944년 5월 니혼강관 공장에서 조선인 ‘훈련공’ 3천여명이 차별과 멸시에 항의해 식당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벌인 농성은 전시체제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다. 그런 아픈 역사를 품은 가와사키시는 1970년대 일찍이 자이니치 등 외국 국적을 가진 이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전국에서 처음 외국인 대표자회의를 조례로 설치하며 자이니치와 일본인이 공생하는 대표적인 지역이 됐다.
‘가와사키가 뚫리면 일본 전체가 뚫린다.’ 우익들은 그런 가와사키를 ‘표적’으로 삼았다. 2013년부터 가와사키역에 원정 헤이트 시위대가 출몰하더니 자이니치 타운까지 진출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의 항의운동이 거셌고 이는 비록 처벌 조항은 없지만 2016년 일본 국회가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을 제정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자이니치이자 여성인 까닭에 송 변호사는 최근 몇년 새 일반 가사재판에서도 상대방에게 차별 발언을 듣는 일이 늘어났다고 했다. 한 남성의 지속적 협박 때문에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기도 했고, ‘방검조끼’를 착용하고 다닐 정도다. “지하철 같은 데서도 자이니치인 게 알려지면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폭력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늘 있다.” 강제징용 문제 갈등까지 커진 지금 그런 공포는 송 변호사뿐 아니라 모든 자이니치에게 해당될 터. 두 변호사는 720명에 대해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혐한 사이트에서 1인당 5만엔씩 모금해 720명이 우리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니 적어도 3600만엔이 있다는 얘기다. 이런 자금으로 또 다른 혐한 선동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어해 무엇이 문제인지 많은 이들에게 깨우쳐주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가 잇따를 것이다.” 헤이트 시위에 맞선 ‘카운터 시위’ 활동가이자 한국에도 번역된 <노 헤이트 스피치>의 저자기도 한 간바라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반격’의 의미”라고 말했다.
‘반격’은 이곳만이 아니다. 지난 8월 혐한 기사를 게재한 <주간 포스트>는 “헤이트 기사”라는 작가들의 반발에 사과문을 냈다. 엊그제는 아이치현 트리엔날레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예술가와 시민들의 지속적 항의 끝에 재개될 것이란 소식이 들려왔다. 한-일 시민 사이 역사인식의 간극은 크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가치의 공유라면 그 거리는 많이 좁혀질 수 있다. 배외주의와 우경화가 거센 가운데서도 ‘차별과 혐오는 안 된다’는 양식있는 목소리가 늘어나며 하나씩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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