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참 징그럽던 세월이었는데, 복직 판결을 받아놓고도 계속 지연되기만 하는 그 날짜에, 그 희망고문에 지친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서른번째다. 이번에는 경찰 대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 부대가 천막을 때려 부쉈다. 죽음이 비단 쌍용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문에 쌍용차 분향소가 세워졌다. 2012년에 이어 두번째다. 2009년은 끔찍한 해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고자 헬리콥터가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최루액을 들이붓고 특공대가 테이저건을 쏘며 공장 지붕으로 뛰어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용산참사의 불타는 망루를 지켜본 다친 심장이 자본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정경합작의 군사작전에 또 한 번 다쳤다. 그 쌍용차 공장은 평택에 있고, 평택 방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되어 달려가는 꿈을 몇년 동안 꾸었다. 멀어지면 덜 아프고 가까워지면 좀 더 아파오는 습관적 통증. 누군가에게는 바로 심장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저 멀리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할 터, 그 ‘사이렌’ 몰고 당신의 내장으로 쳐들어가고 싶다고 상상하면서. 그런 다음 2012년 4월이었다. 2009년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줄줄이 세상을 뜨다가 급기야 22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노조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려 이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이 기억해줄 것을 촉구하기로 했던 날. 천막은 경찰과 용역에 의해 뜯겨나가기를 반복한 끝에 급기야 돌확으로 분을 만든 화단에 밀려났다. 나는 경찰이 천막을 때려부술 때 거기 있었고, 화단을 만들겠다고 천막을 밀어낼 때 거기 있었고, 그런데 당사자는 아니고 연대자도 아닌 채로 거기 있었고, 그 부끄러움을 겨우 한 편 시로 썼다. 참 징그럽던 세월이었는데, 복직 판결을 받아놓고도 계속 지연되기만 하는 그 날짜에, 그 희망고문에 지친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서른번째다. 이번에는 경찰 대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 부대가 천막을 때려 부쉈다. 죽음이 비단 쌍용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겉보기엔 소규모 자본가처럼 보이던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하청업체 대표가 목숨을 끊고, 태움에 지치고 과로에 지친 대형종합병원 간호사가 세상을 버리고, 일자리 없어 노동자도 못 된 이도 죽고,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 이어진다. 그러니 이 분향소가 비단 고 김주중 조합원만을 위한 것이랴. 쌍용차가 고작 100명도 안 남은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인건비가 부담이 되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르는 일에 총대를 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로의 개편. 거기 사람이 설 자리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경제신문들은 습관처럼 “문제는 경제”를 외치며 정부를 압박한다. 기업 하기 어렵다, 자영업자가 괴롭다를 외친다. 하지만 고작 몇십명의 해고노동자를 기만하며 복직을 미루면 그 경제가 좋아지는 건지를 취재하는 경제신문은 없더라. 이름만 자영업자지 알고 보면 사장이란 이름의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노동자를 살려내는 경제가 어떤 건지를 이야기하는 신문도 없더라. 그래서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시키는 것은 이리 어렵다. 우리는 지금 변곡점에 서 있다. 동북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사회 전체가 불안정하다. 사람들은 대량으로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리는 중이다. 난민이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뿌리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전쟁 같은 삶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체제가 거대한 전환을 넘어 거대한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래된 경제질서는 무너지는데 새로운 질서는 아직 안 왔다. 새로운 질서, 노동이 다시 밥이 되는 새 질서.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촛불 드는 것밖에 없는 무기력한 시인은 연대의 시낭송회를 열어 오래된 시를 바치는 것 말고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다.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벼랑으로 누군가가 또 떨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시 대한문. 멀리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 자꾸 들린다./ 이 소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알리는 소리./ 차츰 가까워진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겨울비처럼 내리는 봄비 맞으면서 사람들은 평택 간다는데/ 평택에서 울리는 사이렌은 멀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불행인 것일까./ 귀 막고 엎드리면/ 왼쪽 가슴팍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내장을 빙글빙글 헤집고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
칼럼 |
[노혜경 칼럼] 평택 가는 사이렌 |
시인 참 징그럽던 세월이었는데, 복직 판결을 받아놓고도 계속 지연되기만 하는 그 날짜에, 그 희망고문에 지친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서른번째다. 이번에는 경찰 대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 부대가 천막을 때려 부쉈다. 죽음이 비단 쌍용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문에 쌍용차 분향소가 세워졌다. 2012년에 이어 두번째다. 2009년은 끔찍한 해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고자 헬리콥터가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최루액을 들이붓고 특공대가 테이저건을 쏘며 공장 지붕으로 뛰어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용산참사의 불타는 망루를 지켜본 다친 심장이 자본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정경합작의 군사작전에 또 한 번 다쳤다. 그 쌍용차 공장은 평택에 있고, 평택 방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되어 달려가는 꿈을 몇년 동안 꾸었다. 멀어지면 덜 아프고 가까워지면 좀 더 아파오는 습관적 통증. 누군가에게는 바로 심장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저 멀리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할 터, 그 ‘사이렌’ 몰고 당신의 내장으로 쳐들어가고 싶다고 상상하면서. 그런 다음 2012년 4월이었다. 2009년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줄줄이 세상을 뜨다가 급기야 22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노조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려 이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이 기억해줄 것을 촉구하기로 했던 날. 천막은 경찰과 용역에 의해 뜯겨나가기를 반복한 끝에 급기야 돌확으로 분을 만든 화단에 밀려났다. 나는 경찰이 천막을 때려부술 때 거기 있었고, 화단을 만들겠다고 천막을 밀어낼 때 거기 있었고, 그런데 당사자는 아니고 연대자도 아닌 채로 거기 있었고, 그 부끄러움을 겨우 한 편 시로 썼다. 참 징그럽던 세월이었는데, 복직 판결을 받아놓고도 계속 지연되기만 하는 그 날짜에, 그 희망고문에 지친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서른번째다. 이번에는 경찰 대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 부대가 천막을 때려 부쉈다. 죽음이 비단 쌍용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겉보기엔 소규모 자본가처럼 보이던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하청업체 대표가 목숨을 끊고, 태움에 지치고 과로에 지친 대형종합병원 간호사가 세상을 버리고, 일자리 없어 노동자도 못 된 이도 죽고,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 이어진다. 그러니 이 분향소가 비단 고 김주중 조합원만을 위한 것이랴. 쌍용차가 고작 100명도 안 남은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인건비가 부담이 되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르는 일에 총대를 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로의 개편. 거기 사람이 설 자리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경제신문들은 습관처럼 “문제는 경제”를 외치며 정부를 압박한다. 기업 하기 어렵다, 자영업자가 괴롭다를 외친다. 하지만 고작 몇십명의 해고노동자를 기만하며 복직을 미루면 그 경제가 좋아지는 건지를 취재하는 경제신문은 없더라. 이름만 자영업자지 알고 보면 사장이란 이름의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노동자를 살려내는 경제가 어떤 건지를 이야기하는 신문도 없더라. 그래서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시키는 것은 이리 어렵다. 우리는 지금 변곡점에 서 있다. 동북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사회 전체가 불안정하다. 사람들은 대량으로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리는 중이다. 난민이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뿌리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전쟁 같은 삶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체제가 거대한 전환을 넘어 거대한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래된 경제질서는 무너지는데 새로운 질서는 아직 안 왔다. 새로운 질서, 노동이 다시 밥이 되는 새 질서.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촛불 드는 것밖에 없는 무기력한 시인은 연대의 시낭송회를 열어 오래된 시를 바치는 것 말고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다.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벼랑으로 누군가가 또 떨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시 대한문. 멀리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 자꾸 들린다./ 이 소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알리는 소리./ 차츰 가까워진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겨울비처럼 내리는 봄비 맞으면서 사람들은 평택 간다는데/ 평택에서 울리는 사이렌은 멀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불행인 것일까./ 귀 막고 엎드리면/ 왼쪽 가슴팍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내장을 빙글빙글 헤집고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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