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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2 18:08 수정 : 2018.10.03 10:10

노혜경
시인

그 옛날 70~80년대에 비가 좀 세차게 내리면 옥수동 약수동 계단을 따라 가파르게 지어진 판잣집에서 계단 아래로 바로 부어버린다던 소문이 있는 전설의 그 요강. 어디다가 비워요? 하고 물으니 그냥 길에 붓지, 똥은 가서 누고. 너무 옛날이야기 같은가? 그렇지 않다.

사람뿐 아니라 이름도 차별받는 이름이 있다. 수세식이고 집 안에 있으면 화장실, 푸세식이고 집 밖에 있으면 변소. 연배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변소를 기억할 것이다. 나도 변소 하면 떠오르는 옛날 생각이 있다. 장면 셋.

1980년대 초에 실천문학사를 다닐 때 빈민사목 하는 친구를 잠깐 따라다닌 적이 있다. 서울 상도동 철거민촌과 약수동 꼭대기 판자촌은, 거기 도착하는 일만으로도 사람을 진 빠지게 했다. 친구는 이 사람들이 1800년대 중반 남부여대해서 만주로 가야 했던 유민들의 후예라고 했다. 백년 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믿기 어려웠지만 이미 우리는 다시 계급사회로 돌아왔고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말에는 동감했다. 안타깝게도 그곳의 기억은, “그러니 우리는 혁명해야 해”라고 두 주먹 불끈 쥐었던 기억보다 먼저 코를 찌르는 변소 냄새로 온다.

두번째 장면은 80년대 중반, 부산 영도 고갈산 꼭대기에 살러 가신 수녀님을 따라 그곳에서 야학을 하게 되면서였다. 야학이나 마나 동네 아이들 몇을 모아 한글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이 아이들의 연령대가 초등학교 이삼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일이학년까지였다. 한글을 몰라 취업하기도 힘든 나이 든 아이들을 보자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아이들의 태반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동무들이 지나치게 배척을 해서 학교를 안 가는 버릇이 든 아이들이었다.

냄새난다고 학교 오지 말래요. 동네 목욕탕은 너무 더럽다고 오지 말래요. 물이 부족한 동네에서는 먹는 일 말고는 물을 최대한 아껴 썼기 때문에, 몸도 옷도 아랫동네 아이들처럼 깨끗할 수가 없었다. 이미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가 집집마다 보급되기 시작하던 팔십년대 중반이었다. 아이들은 단지 변소를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다. 역시 가난의 기억은 변소 냄새로부터 왔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흘러 2002년에 부산 개혁당에서 내가 사는 동네에 구의원 후보를 내고 선거운동을 하느라 골목골목을 돌아다닌 일이 있다. 그 시절에 아직도 공동화장실, 아니 그야말로 공중변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 낮은 집과 허술한 변소와 집집마다 있던 요강. 그 옛날 70~80년대에 비가 좀 세차게 내리면 옥수동 약수동 계단을 따라 가파르게 지어진 판잣집에서 계단 아래로 바로 부어버린다던 소문이 있는 전설의 그 요강. 어디다가 비워요? 하고 물으니 그냥 길에 붓지, 똥은 가서 누고.

너무 옛날이야기 같은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며, 그렇기에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나는 고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대책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티브이 프로에 ‘러브하우스’란 것이 있었다. 비록 운 좋은 사람 이야기일지라도, 손대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진 환경에 살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깔끔해진 집에서 살게 되면 일어나는 변화가 정말 좋았다. 특히 그들이 냄새나지 않고 추운 날 밖에 안 나가도 되는 화장실을 들여다보며 짓던 표정에 내가 다 행복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파트를 많이 지어 집값을 잡는다는 방식의 부동산 대책이 매우 어색하다. 부자가 더 비싼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누르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좀 더 깨끗하고 쾌적한 집에 살게 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정책이 아닌가라고, 세상 물정에 찌든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요는, 우선순위가 틀렸다.

원칙만 바로 서면 못할 일이 없는 부자나라에 우리는 산다. 삶이 실패로 돌아갈까봐 불안하고 앞날이 캄캄한 사람들이 국가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면 국가가 왜 필요할까. 토지주택공사 등등이 수익을 말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이들 공기업은 이익의 창출이 아니라 제도화된 정부기구가 하기 힘든 발빠른 주거복지를 하라고 있는 기구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택공사가 아파트를 팔아 수익을 남겼다면, 그 수익은 빈민들의 주거환경 개선 또는 아예 교체를 위해 쓰는 것이 옳고, 영구임대주택을 짓고 관리하는 데 쓰는 게 맞고, 단 한 사람이라도 변소에 가려고 추운 밤 골목으로 나서야 하는 일 없이 살게 하는 데 쓰는 게 옳지 않은가.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근본적 사회계약의 대원칙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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