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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7 18:03 수정 : 2018.12.01 09:18

노혜경
시인

나는 ‘국가부도의 날’을 떠올리면 저절로 분노하고 마음이 상한다. 망한 것은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국민들의 마음은 망했다. 구제금융을 받음으로써 국가는 부도를 면했을지 몰라도 많은 국민은 노숙자가 되고 비정규직이 되었다.

28일 수요일 의미심장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국가부도의 날>이 제목이다. 1997년 12월3일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아이엠에프가 요구하는 각종 가혹한 경제정책을 받아들이기로 한 날이다.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몸을 지닌 국가로 진입했다.

국가의 금고에 외환이 부족했을 뿐이었는데, 탐욕과 생존 본능은 남기고 연대와 공존의 마음은 파괴하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1997년 한해 동안 대한민국 경제에 일어난 각종 참사는 비극을 예고하고도 남았지만,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결정한 ‘국가’는 우리가 어떤 ‘국가’로 이행하게 될지를 예상하고도 선택했을까.

사람들을 급격히 각자도생의 이전투구 속으로 내몬 의식의 붕괴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서서히 병들고 있던 한국의 경제였다고 하지만, 뼈대가 몽땅 어긋나고 새로 짜맞춰진 급격한 순간의 후유증은 깊고 길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지니게 되고 조금이라도 덜 가진 사람은 점점 더 망하는, 말하자면 양극화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남아 있는 공동체적 정서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금 모으기, 알짜 공기업 몽땅 팔아치우기 등으로 세계가 놀랄 만한 속도로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갚았다는 기적의 서사 뒤에서, 성실하게 살면 잘살 수 있다는 국민의 믿음은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마음이 흐르다 묶여 썩고 고이는 지점이 바로 저 아이엠에프의 고통! 이것이 아이엠에프 사태, 아니 그냥 아이엠에프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고 상처다. <국가부도의 날>은 제목부터가 그날을 정면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시 기억의 표면으로 끄집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절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각종 경제지와 주류를 대변하는 언론들은 너무 쉽게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어렵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지만, 실제로 비교의 기준으로 징발한 그 아이엠에프 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하거나 그로 인해 저질러진 각종 파탄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지금 이대로”를 외치던 그 마음으로 정권 탈환에만 신경을 쓴다고 나는 의심한다. 한일합병 당시 조선의 고급관료들 중 진심으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염려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때나 지금이나 권한과 부를 지닌 자들이 공동체를 향한 책무를 방기할 때 그게 바로 아이엠에프 아닌가. 우리는 아이엠에프를 졸업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자신이 아이엠에프 체제의 전시장이 된 것일 뿐이다. 아이엠에프적 기준, 소위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사실상 효용이 다해버린 지금에도, 여전히 그 기준에 맞추어 ‘더’ 어렵고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를 말하는 것은 사기극이다.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국가부도의 날>을 떠올리면 나는 저절로 분노하고 마음이 상한다. 망한 것은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국민들의 마음은 망했다. 구제금융을 받음으로써 국가는 부도를 면했을지 몰라도 많은 국민은 노숙자가 되고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게 만든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과 세계화의 환상과 불완전한 민주화와 질 나쁜 가족주의에 대해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 경제정책을 담당했던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상상력이 국민 전체가 아니라 소위 가진 자들만의 나라에 집중했다는 사실도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 태극기부대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과거의 대한민국을 망하게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이 아니라 아이엠에프고, 그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를 몰고 온 과거 전부다. 무서운 입시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고, 친구를 괴롭히고 죽이는 일로 스트레스를 풀게 만든 건 그 아이엠에프를 통해 돈만 아는 세상으로 노골적으로 걸어나간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 그들은 흥하고 우리는 망했다. 다시 한번, 이번 생은 망했다를 외치는 젊은이들의 말을 되풀이한다. 이생망!이라고.

영화가 개봉되는 28일은 영화 속에서 일주일 후 국가가 부도날 거라는 사실을 주인공 김혜수가 예견한 날이다. 실제로는 외환위기를 정부가 인정한 뒤 14일 만에 구제금융을 받았다. 영화는 허구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융가들과 관료들은 허구가 아니다. 국가는 부도를 면했지만, 부도 또는 멸망을 향해 굴러떨어지기만 하는 어떤 삶들이 여전히 진행중인 것은 면하지 못했다.

우리는 피해 갈 수 있었을까? 방법이 있는데도 선택하지 않은 것일까? 어떻게 하면 붕괴된 공동체를 회복하고 연대의 정신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추상적이고 거대하지만 절실한 마음으로 <국가부도의 날> 영화보기 번개를 칠 생각이다. 번쩍번쩍 우르르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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