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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2 18:06 수정 : 2019.01.22 19:29

나는 김석기가 아마도 “국가와 민족의 성장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애국적 결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그렇게 봐주기엔 비겁한 태도가 걸리기는 하지만.

노혜경 시인

작년 이맘때도 나는 용산참사를 잊지 말자는 글을 썼다. 참사 10주기가 지나갔으니, 게다가 한번 쓴 적도 있으니 또 이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은 뻘쭘할까? 끈질기게 말해야 할 일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쉽사리 새로운 관심사에 묻혀버리거나, “듣기 좋은 꽃노래” 취급을 당하며 “피로감” 운운해버리기 일쑤인 사회에서는 이런 일에도 용기가 좀 필요하다. 이런 고민 자체가 참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고민은 또 있다. “자기 일도 아니면서 너무 떠든다.” 이 말과도 나는 싸워야 한다. 내가 몹시 좋아하는 가톨릭 신학 용어 중에 ‘죄의 연대성과 구원의 편재성’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지은 죄가 모든 이의 죄가 된다는 각성, 그리고 한 사람이 구원받음으로써 모든 이가 구원받는다는 자기 다짐.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이다. 고통을 극복하고 함께 잘 살자는 이야기를 하는 데도 당사자 됨이 필요할까?

또 문제는 있다. 왜 나는 화부터 날까. 내 일이 아닌데 내 일이 되고야 마는 이 지점에 내 화가 머물러 있고, 화가 나지 않거나 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가끔은 폭탄 투척이 하고 싶어진다. 도시락 폭탄 말고 언어의 칼날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생각의 폭탄.

마침 어제 이 끔찍한 살인사건의 실행 책임자인 김석기가 “지금도 같은 상황(용산참사)이 발생하면 똑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상황’과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나는 10년 동안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는 아마도 10년 동안 이 일을 파묻거나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보냈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합리화가 필요하지 않은 신념을 지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즉 그는, 남일당 그 자리를 비싸고 수익이 많이 나는 고층건물을 지어야 할 장소로 보았던 사람들에 속해 있다. “방해자”를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는 고대인 같은 생각은 안 하겠지만 “불가피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속해 있다.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에 대한 김석기와 나의 답은 다르다. 나는 김석기가 아마도 “국가와 민족의 성장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애국적 결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그렇게 봐주기엔 비겁한 태도가 걸리기는 하지만. 반면에 나는 “그 국가와 민족에 나와 희생당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자리가 없다면 그런 희생을 왜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 차이는, “국민소득 3만불인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왜 나는 3만불은커녕 1만불도 못 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이며, 이렇게 구분해가다가 보면 이 균열은 생각보다 깊고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한 전폭적 점검과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기다. 이른바 체제변동기다. 시대착오적 김석기들이 여전히 투표로 선출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변동기다.

눈에 보이는 용산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더 큰 용산은 어떨까?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에서 붕괴된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심지어 지지마저 얻고 있는 한서진(염정아)은 작은 용산에서 큰 용산으로 옮겨가는 도정에 있는 한 전형이다. 불타는 망루를 어렵게 탈출했지만 영혼은 여전히 불타오르며 쫓기고 있다. 한서진이 “다시는 나는 저곳에 있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 때 마음이 슬프다. 거기가 용산인 한, “언제고 저기 망루에 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우리 모두는 안다.

2009년 1월20일, 2009년 5월23일, 2009년 8월4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격히 굴러떨어질 수 있는가, 얼마나 쉽게 지옥문이 열리는가를 보여준 날짜들이다. 호프집을 운영하고 횟집 사장이었던 중산층이 대자본의 발아래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살해까지 당할 수 있었던 날,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갖은 모욕을 당하며 스스로 생을 버려야 했던 날, 소위 귀족노조원들이 전쟁터의 적처럼 진압을 당했던 날. 그 후 10년이 지났고, 우리는 조금 나아진 환경에서 지나간 일들을 복기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를 갈라놓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 균열, 이 크레바스를 그냥 둔다면, 다음번 반동은 정말로 결정적인 것이 되리라는 예감이 나를 어둡게 한다. 그러나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시시포스의 돌이 도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순리라고 믿는 김석기와 그 지지자들에 맞서서 기어이 재를 넘고야 마는 바로 그 당사자다. 당사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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