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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2 11:17 수정 : 2019.12.02 16:43

길을 찾아서 19회-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민주당 4명·공화당 6명 대통령 관찰
최초 흑인 대통령 오바마 등장 ‘기이’
“실제 흑인인권운동 했다면 당선 불가”
여성 대통령 한명도 배출 못한 한계도

‘카터’ 재임시절 유일하게 전사자 없어
연방헌법 ‘정교분리 원칙’ 철저 준수
사다트-베긴 ‘캠프데이비드협정’ 산파

‘아들 부시’ 9·11 대응 ‘테러와 전쟁’
기독교 선악관 그대로 ‘악의 축’ 규정
“전쟁 지속할수록 민주주의 원칙 침식”

미국 민주주의 장점은 ‘창조 정신’
자유·평등·행복 ‘독립선언서’ 명시
도전 때마다 연방헌법에 ‘수정조항’

‘제도 안에서의 자유’로 방종 견제
‘언론 자유’로 민주주의 산소 공급
“다른 의견도 서로 존중하는 관습”

길을 찾아서 19회-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평화병’ 처방을 찾고자 미국에 정착한 박한식 교수는 역대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지미 카터와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두 대통령의 상반된 행적에 특히 주목해왔다. 1978년 9월5일 워싱턴디시 북쪽 메릴랜드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지미 카터(가운데)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안와르 사다트(맨왼쪽)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맨오른쪽) 이스라엘 총리가 도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지미커터도서관 제공
1978년 9월5일부터 13일간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합숙하며 협상을 벌인 사다트(맨왼쪽)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맨오른쪽) 이스라엘 총리는 17일 백악관에서 카터(가운데) 대통령의 주선으로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
내가 반세기 이상 미국에 살면서 관찰한 10명의 미국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동안 민주당에서 4명의 대통령을, 공화당에서는 6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존슨은 베트남전쟁의 책임을 지고 재선을 포기했고,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또한 인종주의를 해소하지 못한 미국에서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기이한 모습도 보았다. 오바마의 당선은 마틴 루서 킹의 흑인인권운동을 통해서 미국의 정치문화가 크게 혁신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정작 흑인인권운동을 했더라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여성 대통령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한 한계도 보았다.

‘평화병’을 앓고 있는 내가 특별히 주목한 대통령은 카터와 아들 부시였다. 미국은 전쟁의 나라다. 카터를 뺀 역대 미 대통령 모두가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카터 재임 중에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카터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정부의 정책에는 결코 반영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미국 연방헌법에서 규정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중동 평화를 위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믿는 팔레스타인 자치구도 정치적으로 인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탄생시키는 산파 구실을 했다.

조지 더블유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3년 3월 18일 오전 10시(한국시각)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의 주요 구실이였던 대량살상무기는 2006년 12월 30일 사담 후세인의 사형으로 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아들 부시는 카터와 정반대였다.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다. 특히 북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을 ‘악의 축’으로 선포하면서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역시 카터처럼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지만, 카터와 달리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정책에 단호하게 반영시켰다. ‘악의 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의 선악관이 적나라하게 투영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과 같은 ‘악의 축’은 정치적 협상 대상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철저히 응징해야 할 대상만이 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들 부시가 표방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도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테러의 본질은 전쟁이 아니라 일종의 캠페인이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통해서 국제여론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막강한 전쟁 수단을 지녔다 해도 그 캠페인은 결코 끝낼 수 없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처럼 전쟁이 지속되면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지속적으로 침식될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는 2008년 미 역사상 첫 아프리카계 대통령에 당선된 데 이어 2012년 연임에 성공했다. 2009년 1월 백악관에서 오바마가 부인 미쉘(오른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44대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8년 12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자 한 흑인 지지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한식 교수는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처럼 실제로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면 대통령으로 뽑히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을 찾아서’ 18회에서 구성한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수단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분석적으로 평가해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미국 민주주의는 기존 제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미국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제기되는 각종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할 수 있는 처방책으로서 고안되었다. 그러한 창조 정신은 1787년 6월28일 연방헌법 제정회의 때 벤저민 프랭클린의 연설에 여실히 담겨 있다. “우리는 좋은 정부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상이한 형태의 공화국 정부를 검토했지만, 그것은 모두 붕괴의 씨앗을 품고서 수립된 불완전한 정부였기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유럽의 모든 근대 국가를 검토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국가도 우리 실정에 맞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환경의 특수성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지식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건국 초기 미국이 직면한 도전을 다섯가지 정도로 정리해봤다. 첫째, 독립혁명 이후 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 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만 했다. 둘째, 국가의 치안 능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개인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셋째, 13개 주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해야 했다. 넷째,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흑인과 인디언 등 소수 인종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다섯째, 미국은 이민사회다. 따라서 다인종이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제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미국은 1776년 대륙회의에서 준비한 ‘연합헌장’을 1781년 3월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의 승인을 거쳐 채택했다. 이후 지금까지 ‘수정조항’을 추가해 보완을 하고 있다. 사진은 1787년 9월 17일 연방 헌법 제정 장면을 그린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1940년 작품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은 이들 도전에 맞서 비교적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먼저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자유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기로 하자. 우선 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연방헌법에 ‘수정조항’을 추가했다.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수정조항에서는 종교·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규정했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계몽주의의 지적 전통에 따라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원칙을 천명했다. 또한 그때 국가의 치안 능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수정조항 제2조에서 개인의 총기 휴대 권리를 규정했다. 흑인과 인디언 등 소수 인종의 권리를 보장하는 과제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해결했다. 1870년 비준된 수정조항 제15조를 통해서 흑인의 참정권을, 1920년 비준된 수정조항 19조를 통해서 여성의 참정권을, 1924년 통과된 스나이더법(Snyder Act)을 통해서 인디언의 참정권을 각각 인정한 것이다.

미국의 연방헌법에서 보장한 자유는 현실 정치에서 비교적 잘 이행되고 있다. 미국 사람들에게 자유란 한마디로 ‘제도 안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제도를 벗어난 자유는 철저히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탄탄하다. 미국 사회에서 자유가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가 우려한 ‘방종’으로 전락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원칙 역시 적어도 미국 국내 정치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선거판에서 특정 종교세력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 그들 모두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한다. 따라서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다. 미국의 높은 시민교육 수준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민주주의가 호흡할 수 있는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공급 방식은 ‘객관보도’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은 ‘객관보도’에 충실함으로써 매체에 한정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국민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선에서 멈춘다. 특히 미국 언론은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미국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언론은 국민들이 외면해 버리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다. 언론의 자유 역시 미국의 높은 시민교육 수준이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 미국 언론의 사설·논설·칼럼 등의 필자는 각자의 식견에 따라 언론의 보도 내용을 해석하고 비평한다. 이는 언론이 정치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사 간부가 필자로 나서는 사례는 없다.

나 역시 미국이나 국제 매체를 통해 내 견해를 적극적으로 밝혀왔다. 나는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에서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4년간 정치평론가로 활동했고, 그 이후에는 <시엔엔>(CNN) 등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지금도 영국의 <비비시>(BBC), 중동의 <알자지라>, 터키의 <티아르티>(TRT),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등에도 출연해서 정치평론을 계속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는 <에이비시> <시엔엔>(사진) 등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는 물론 영국 <비비시>, 중동 <알자지라>, 터키 <티알티>, 일본 <엔에이치케이> 등에도 출연해 정치평론 활동을 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특히 국제 매체의 정치평론을 통해 민주적 토론 규범을 체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미국과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알자지라에 출연해서 북한 문제에 관한 정치평론을 하고 나면 미국의 방송사에서 나에게 유사한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적이 많았다. 미국 방송사는 대체로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전문가를 섭외해서 나와 논쟁을 붙인다. 나는 나의 연구에 기초를 둔 북한에 대한 견해를 알자지라나 미국 방송에서 일관되게 얘기했다.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전문가 역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논쟁이 파국으로 치닫는 사례는 없다. 나는 상대방에 동조는 하지 않지만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고, 상대방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우리들의 논쟁을 보면서 흥미를 느낀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방송사에서 자꾸만 나를 인터뷰에 초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청자가 우리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과정 자체가 살아 있는 정치교육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이나 국제 언론의 인터뷰에 참여하면서 배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철저히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전문직주의’는 개인의 전문적 능력을 의미하는 ‘전문가주의’(expertism)와 달리 문화적 현상을 의미한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모르는 ‘잡학다식가’(generalist)가 발을 붙일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에서 실천하는 자유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연방헌법의 개인 총기 휴대 권한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총기를 휴대한다는 것은 곧 타자의 자유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총기 사고가 가장 많이 나라로 꼽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은 13개 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연방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의회에서도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각 주에 의원 2명을 일률적으로 배분하는 상원제를 택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각 주의 자율성을 반영하기 위해 선거인단 제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위와 같은 제도들은 문제가 없지 않다. 계몽주의에서 평등이란 개인의 평등을 의미했지, 집단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상원제나 선거인단 제도 등은 ‘주’라는 집단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다 보니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처럼 미국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서도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는 비민주적 모순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미국 민주주의를 평등의 관점에서 평가해도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번째는 ‘승복의 문화’다. 예컨대 대통령 후보자가 선거 기간 중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더라도 선거 결과가 나오면 패자는 지체 없이 승복하고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축하 인사를 건넨다. 나는 미국에 정착된 승복의 문화가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상징하는 지표 중 하나라고 본다. 다수결은 개인의 평등을 전제한 제도다. 따라서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의 평등을 유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1776년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에서 준비한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1781년 3월 모든 식민지의 승인을 거쳐 채택했다. 그러나 연합헌장을 통해서 탄생한 연합국가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취약했다. 연합국가에 부여된 권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787년 제헌회의에서 연방정부를 탄생시켰다. 연방정부는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정치적 조정이 필요한 권력을 부여했다. 다만, 대통령의 권력 남용으로 국민의 자유가 유린될 것을 우려해서 삼권분립 제도 또한 채택했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냉전 시기에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예컨대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행정명령을 통해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대법관 9명을 모두 임명할 수 있고, 사면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데, 이런 권력은 모두 삼권분립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연합헌장’의 첫번째 문장은 ‘위 더 피플’로 시작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장점은 ‘배심원 제도’다. 국민에 의한 동의를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제도라고 본다. 1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무작위로 선발된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선발된 배심원은 민주적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한다. 나 역시 배심원에 여러 차례 선발되어 민주적 토론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미국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의 동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끝으로 미국 민주주의는 합리적 설득에 의해서 운영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혈연·학연·지연·돈·권력 등이 연루된 설득은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민주적 관습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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