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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8 20:12 수정 : 2010.11.18 20:36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선 십자가들 사이에/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었네…”

1915년 유럽 플랑드르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군의관 존 매크레이가 전사한 전우의 무덤가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양귀비꽃을 보고 쓴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11월11일이 올 때마다 영국인들은 이 시에 나오는 붉은 양귀비꽃 배지를 사서 달고, 수익금은 참전 군인들을 돕는 기금으로 쓴다.

지난주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전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가슴에도 어김없이 붉은 양귀비꽃 배지가 선명했다. 중국 정부는 캐머런 총리에게 정상회담 때는 이 배지를 떼달라고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거절했다.

중국인들에게, 영국 총리의 가슴에 달린 붉은 양귀비꽃은 완전히 다른 역사를 이야기한다. 19세기 초 영국의 집요한 요구로 중국(청나라)-영국 무역이 시작된 뒤 중국은 차 수출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냈다. ‘선진 제품’을 중국 시장에 팔아 큰 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실망한 영국은 결국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마약·아편을 중국으로 대량 수출하기 시작했다. 1839년 청나라가 아편무역 금지령을 내리고 청의 고관 린쩌쉬(임칙서)가 영국산 아편 2만상자를 몰수해 불태우자, 영국이 아편 무역의 거대한 이익을 지키려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서구의 군사력 앞에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1842년 난징조약을 맺어 홍콩을 내주고 몰수했던 아편에 대한 거액의 보상금까지 내야 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170년이 흐른 오늘, 막강한 경제력을 갖게 된 중국은 ‘모욕의 세기’를 뒤로하고 우뚝 일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꾼다. 중국이 더 많은 물건을 사주고 더 많은 투자를 해 휘청이는 경제를 살려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유럽 각국이 중국에 손을 벌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제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중국식 질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위안화 환율과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화폐전쟁’은 그 상징이다.

지난주 정상회의를 앞두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G20 참가국 정상들에게 보내는 서한’까지 발표해 대중국 위안화 절상 압박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구체적 절상 합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미국은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낮게 조작해 막대한 무역이익을 얻고 있다고 공세를 취했지만, 미국이 양적완화 정책으로 대규모 달러를 시장에 풀어 다른 나라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중국의 주장에 지지를 보낸 나라가 더 많았다.

이번 서울 정상회의는 ‘미국의 추락’을 상징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세계 패권의 주요 축인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뒤흔드는 논의가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G20 차기 의장국인 프랑스는 기축통화 체제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고 6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 시스템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중국도 기축통화 개혁을 외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붉은 양귀비꽃에 대한 동서양 기억의 거리만큼 ‘중국의 시대’는 ‘미국의 시대’와는 다른 세계질서를 예고한다. 서구 지배 시대의 종언이다. 하지만 중국식 세계질서는 아직 세계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한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모순과 도전에 부닥쳐 있는 중국은 경제·사회적 개혁을 강조하고 있지만, 서구식 질서에 ‘노’라고 말하는 것 외에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옛 질서가 몰락하고 있지만 새 질서는 보이지 않는 불안한 아노미 시대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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