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17 20:29
수정 : 2011.03.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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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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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도쿄 특파원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난 11일 오후, 30분 넘게 엄청난 진동이 땅을 흔들었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사는 도쿄는 진앙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건물들도 내진설계가 워낙 잘 돼 있어 피해가 아주 적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지진해일(쓰나미)이 밀려들지 않았다. 강한 여진 속에서, 도호쿠 지방에 밀려든 해일이 달리는 자동차를 삼키는 모습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면서도 그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은 좀체 들지 않았다.
수백번의 여진을 겪은 지금은 지진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좁은 공간에 들어서서 몸을 움직이면 심장 박동이 가끔 지진이 되어 몸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아무리 큰 여진이 온다고 해도 이제 무서울 것 같지가 않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위태로운 상황은 몇백배 강한 ‘쓰나미’가 될 수도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작은 두려움은 더 큰 공포 앞에서 희석되는 법인가 보다.
안전을 걱정해 회사는 가족들을 우선 철수하게 했다. 16일 밤늦게 가족들은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치원 수료식을 하루 앞두고 있던 작은놈은 이른 아침 선생님께 슬쩍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수료증을 비롯해 졸업식 때 주려던 것들을 모두 챙겨놓았더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큰놈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눈이 빨개진 담임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오후 내내 하모니카만 불었다. 아, 이런 게 ‘배반’이지. 두 녀석은 다시 도쿄로 돌아오더라도, 필경 일본어로 ‘해국인’(나라를 해치는 사람)으로도 읽힐 수 있는 ‘외국인’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맘이 편치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다. 상황은 호전되지 못한 채, 원전을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 여유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안부를 걱정하는 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와, 일에 방해가 될 정도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미국에서 살다가 얼마 전 도쿄의 회사에 취직해 입국한 한 지인은 밤늦게 전화를 해와서는 “아직은 포기하고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본을 떠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이 험악한 상황을 묵묵히 견디는 일본 사람들을 보면서 평온해지는 것일 게다.
오랜 세월, 지진과 해일, 홍수와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를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온 일본인들이다. 자연과 삶을 보는 그들의 태도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은 환경운동가가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생명과 사물에 깃든 정령을 존중하는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사재기가 일어나고, 위험을 피해 탈출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구실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면, 숙연해진다.
원전에서 250㎞ 떨어진 도쿄는 아직 안전하다. 만일의 경우 피난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상대적으로 피해는 작을 것이다. 일본 수도권엔 지금 3000만명이 있다. 그들은 지금 원전 사고와 목숨 걸고 싸우는 이들을 믿고, 그들을 격려하느라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나중에 따져도 좋다. 지금은 그들 모두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한다. 언제나 희망은 있다. 위로가 아니라, 격려가 필요한 이유다.
1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한대 피워 물고 6층 발코니에 섰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마스크를 한 젊은 엄마가 강변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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