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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17 19:18 수정 : 2012.05.17 19:18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9일 동성결혼 지지 입장을 밝혔다. 진보적 가치에 대한 개념 부족 탓인지, ‘이 시기에 왜 그런 한가한 이슈를’, ‘표에 유리한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인간 오바마’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통령 오바마’의 행동이 정치적 계산 없이 오직 숭고한 신념에 의해 나오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손해 보는 장사’ 아니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동성결혼 찬성률은 50%를 넘었고, 민주당 지지층에선 찬성률이 더 높아 지지층 결집효과도 있다. 동성결혼 이슈가 부각되면 청년실업, 재정적자 등 현직 대통령에 불리한 경제 이슈가 묻혀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오바마는 동성결혼을 지지한다면서도 ‘개인적 지지’라 말했고, 또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고 규정한 연방헌법의 ‘결혼수호법’ 변경 추진 계획은 없다고 못박았다. 이를 두고 동성애 인권운동가인 브루스 캐럴은 “1860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노예제 폐지 지지선언 같다”고 꼬집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전임자였던 뷰캐넌은 “‘개인적으로’ 노예해방을 지지한다. 각 주가 이를 다룰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가 연방 이슈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동성애자가 취업·승진 등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처한다면 이는 소수자 인권보호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기존 결혼제도까지 바꾸는 건 정치·종교·철학·생물학적으로 복잡한 수식이 나온다. 의료보험, 세제 등의 혼선과 이를 악용한 허위 동성결혼 등 현실적 준비도 필요하다. 오바마는 여기까지 갈 생각은 애초 없었다. 오바마가 “내 생각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동성결혼 지지선언에는 개인적 주관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오바마가 대단한 진보의 역사적 발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인식하는 건 너무 나이브(순진)하고, 반대로 위선자라고 공격하는 건 작은 진심마저 무시하는 외골수처럼 비친다.

오바마의 동성결혼 지지선언 뒤, <뉴욕 타임스>는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7%가 ‘오바마 발언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신에 따른 결정’이란 응답은 24%였다. ‘동성결혼 과반 지지’에 대해서도 “동성결혼을 지지한다고 해야 진보적인 것처럼 비치기에 여론조사에선 동성결혼 지지율이 높게 나오지만, 실제 지지율은 그만큼은 아니다”는 해석도 나온다. 요즘 사람들은 정치인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얼렁뚱땅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진심을 꺼내 보여도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너무 많이 속은 탓이기도 하다.

미국 동성결혼 이슈를 보며 엉뚱하게 한국의 통합진보당이 어른거렸다. 보수언론의 날카로운 이빨에 박힌 채 이리저리 온몸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는 게 곤혹스럽다. 한국에서 정치부 기자로 정치인들을 만날 때,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내 귀에는 ‘정치적 잇속’만 번역돼 들렸다. 통합진보당 옛 당권파가 사퇴를 반대하는 백가지 숭고한 이유를 갖다대도, 국민들은 사퇴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잇속’만 들여다본다. 유권자는 이제 ‘설득되는’ 민중이 아니다. 더이상 계몽의 대상도 아니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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