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24 19:11
수정 : 2012.05.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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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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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만에, 천안문 민주화시위 정치범 리위쥔이 감옥에서 나왔다.
1989년 6월3일 밤, 22살의 노점상 리위쥔은 중국 베이징 거리에서 유조차에 불을 질렀다.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진압하러 가는 인민해방군을 저지하려 한 방화죄로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이후 감형됐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어느새 마흔다섯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최근 홍콩 신문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다. 다음달 4일이면 천안문 시위 진압 23주년이다. 광장에서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옥고를 치른 뒤 망명하거나 추방돼 다시는 중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군대를 막으러 나섰던 수많은 시민들은 목숨을 잃고 감옥에 갇혔다. 리위쥔처럼, 이들은 잊혀졌다.
1995년 신문사에 입사해 경찰서 출입 기자로 세상의 온갖 사건들을 기웃거리던 시절, 의문사 사건이 많았다. 노동운동을 하다 실종된 뒤 어느 날 자살이나 실족사 등으로 발표된 죽음들, 진실을 밝히려고 발을 구르던 유족과 동료들…. 하지만 이들은 곧 잊혀져 갔다. 노동자들의 억울한 현실을 알리겠다며 분신했던 이들도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대학 시절 침묵하는 방관자였던 나는 취재수첩을 들고 시위와 농성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들었고, 그런 희생들을 밑거름으로 한국 사회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부정 투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전쟁과 분단이 남긴 상처와 어려운 정치 환경 속에서 한국 사회가 여기 오기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뎠다. 통합진보당 당권파 몇명이 진보의 이름을 납치해, 진보의 가치에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 이토록 큰 상처를 줄 권리는 없다. 하지만 망각을 거부하라.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부정과 아집을 폭로하는 것으로 보수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급기야 검찰이 나서 공안 정국의 판을 만들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약자들을 희생시키면서 기득권의 촘촘한 그물망을 짜온 이들이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남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분배와 공정함을 갈망하는 시점에, 이들은 진보를 공격하는 것으로 다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첸리췬 베이징대 교수는 최근 한국에도 번역·출판된 <망각을 거부하라>에서 강력한 국가 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민주와 공정을 추구해온 중국 ‘진보’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우파’의 낙인이 찍힌 채 희생된 지식인들은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고 당 간부들이 특권계층이 돼버린 현실을 비판했다. 이들이 제기한 변화의 요구는 중국 역사의 물줄기 아래 살아 있다가 1989년 천안문 시위에서 다시 분출했고, 언젠가는 되살아날 것이라고 첸 교수는 암시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더 공정하고 희망을 주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많은 이들이 남긴, 포기할 수 없는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공안 정국과 기득권 유지가 그 답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길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절망에 반항하고 연대하고 분투하자고 첸리췬은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노력한다. 우리는 이처럼 서로서로 부축한다-이것으로 충분하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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