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9 19:06
수정 : 2013.05.09 19:06
|
정남구 도쿄 특파원
|
지난해 6월 재일 사진작가 안세홍씨의 ‘중국에 남은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이 도쿄 신주쿠의 니콘살롱에서 우여곡절 끝에 열렸을 때, 전시회가 열리는 건물 앞에서 10여명의 우익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벌였다. 사진전을 취재하려고 그 앞을 지나다가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는 체험을 했다. 시위대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한 그림을 내걸고, 차마 그대로 듣고 있기 어려운 섬뜩한 구호를 외쳤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 방문한 뒤, 일본 우익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는 ‘조센진 죽여라’ 하는 구호가 나왔다. 저들이 사람인가 싶었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것을 두고 고종 임금이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으로도 저들의 죄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던 말이 귓전을 스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몇 시위 참가자들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며칠 전 국회에서 이에 대해, 한 야당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한마디 했다.
“일부 나라, 민족을 배척하는 언동이 있는 것은 극히 유감스럽다.”
아베 총리의 발언 가운데 도드라진 것은 그런 언동이 일본인답지 않다고 강조한 부분이다. 그는 “일본인은 인화를 중시한다. 배타적인 국민이 아니었다. 어떤 때도 예의바르고 관용을 갖고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인이다”라고 말했다.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 수정이 군국주의적 사고의 봉인을 뜯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자랑스런 일본인’은 ‘조센진 죽여라’ 같은 말을 해선 안 된다고 설득하는 대목에선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본 극우단체 회원들의 시위 소식을 한국에 전할 때 주저하게 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행태가 마치 일본 사회의 대세인 것처럼 오해를 부를까 염려해서다. 신주쿠 한류거리에서 우익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그들을 조롱하며 대항시위를 벌이는 일본인들을 보면, 극우파를 견제할 힘이 일본에 아직 탄탄하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인을 혐오하는 글이 넘쳐나는 인터넷 사이트 ‘2 채널’을 볼 때의 불편함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볼 때도 그대로 느껴지곤 한다. 피해자인데다, 일본이 진심으로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의심하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강한 불만을 갖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증오는 분노와는 다르다.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면 ‘싹 가라앉아버려라’고 하거나, 북한이 미사일을 쏘려고 준비하는 것을 두고 ‘도쿄 한복판에 날려버려라’라고 하는 말은 듣기에 참으로 거북하다. 그것을 제어하려는 목소리는 잘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은 번역 소프트웨어가 발달해 한국인, 일본인이 서로의 인터넷 사이트에 오른 글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젊은 일본인 가운데는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며 반한감정이 커간다고 털어놓는 이들도 있다. 익명의 사이버 공간엔 쓰레기 같은 언어도 있기 마련이다. 그 공간의 특징을 서로 이해하고 큰 줄기를 보려는 지혜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증오가 승하면 과거를 극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자신을 더 파괴한다는 점을 먼저 함께 새기면 좋겠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