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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9 19:05 수정 : 2014.10.09 19:05

길윤형 도쿄 특파원

지난 1일 평소 교류하던 일본인들로부터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았다. 사실 시사회라고 해야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인 몇몇이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조촐한 자리였다. 서둘러 기사를 마감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분쿄시빅홀 지하 1층 학습실에 도착했더니 10여명의 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영 예정인 영화는 <또 하나의 약속>. 그렇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황유미씨의 사연을 다룬 바로 그 영화다.

이번 시사회를 준비한 ‘니시가하라 자막’의 하야시바라 게이고는 “영화 상영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영화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최근 일본 사회엔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을 조장하는 ‘헤이트 스피치’(반한 시위)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대표 기업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를 일본 사회에 소개하면, 일본의 혐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을 터였다. 실제로 몇몇 일본 언론들은 삼성전자의 올 3분기 실적이 대폭 악화되자 삼성이 금방이라도 도산할 것 같은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일본인들의 반응에서 ‘한국이 싫어졌다’는 혐한 정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인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연신 “좋은 영화”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고,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책임추급(추궁)재판 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한국 지도를 가져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속초가 어디인지 찍어 달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달 22일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황유미씨의 사연을 다룬 다테이와 요이치로 기자의 반응이었다. 그에게 황유미씨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물었더니 “유해 약품을 사용해 직원들이 숨진 오사카의 출판사 사건을 취재하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노동자 사연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 그가 제작한 뉴스를 보니, 황유미씨 등 한국 피해자의 사연을 다룬 뒤 다시 일본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를 보면, 석면과 같이 발암성이 인정돼 제조가 금지된 물질이 8개에 불과하지만 일본 산업계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모두 6만개로 나타난다. 산업계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공통 과제인 셈이다.

자리가 무르익어가며 화제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옮겨갔다. 이 영화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개인 투자자 1만여명으로부터 10억원의 제작비를 모았고,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해 배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또 다른 투쟁의 결과는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길게 이어졌던 개인 투자자들의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 그게 그런 의미였어요?” 설명을 듣고 난 한 일본인이 신기한 듯 물었다.

“네, 그게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모아준 사람들의 이름이에요.”

나도 모르게 불쑥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국가원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재벌에 맞서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러서지 않은 한국 시민들의 투쟁의 기록이 자랑스러워 난 영화가 끝난 뒤 살짝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나고야(11월14일), 오사카(15일), 도쿄(16일) 등에서 일본 관객을 찾아갈 예정이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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