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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7 18:54 수정 : 2017.12.07 19:10

조기원
도쿄 특파원

지난 10월 초 도쿄 신주쿠 와세다대 근처에 자리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왐)에서 열린 일본인 위안부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다.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를 듣고’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세미나에서 논픽션 작가인 가와다 후미코가 일본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취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와다는 한반도 출신 중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린 고 배봉기 할머니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빨간 기와집>이라는 책을 낸 논픽션 작가다.

가와다는 요코하마 출신 이시카와 다마코(가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시카와는 태평양전쟁 시기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등에 있는 위안소에서 생활했다. 이시카와는 하루 남성 100~200명을 상대해야 했던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1988년 잡지 <아사히 저널>은 이시카와를 조선인 위안부라고 적어 기사화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시카와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생활습관과 언어 등이 한반도 출신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시카와가 1908년생인데 이 시기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유학생 등 극히 일부였을 뿐이라는 점도 의문의 근거였다. 가와다는 이시카와가 숨진 해인 1991년 그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갔다고 한다.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를 본인에게 직접 물으려고도 했으나 병색이 짙어 차마 묻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가와다는 주위에서 이시카와의 본명을 물어보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서 다시 찾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이시카와는 숨진 뒤였다.

가와다는 이시카와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결국은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와다는 일본 안에서 위안소 생활을 했던 일본 여성 다미(가명)의 이야기도 소개했다. 어렸을 때 주위에 “나중에 오차노미즈(여대)에 갈 거야”라고 말할 만큼 공부에 의욕을 보였던 다미는 빈곤한 가정 환경 탓에 유곽에 팔려갔다가 태평양전쟁 때 위안소 생활도 했다. 위안소 주변의 주민들은 그에게 “나라를 위해서 수고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왐에서는 최근 <일본인 ‘위안부’의 침묵―국가에 관리된 성>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년 7월까지 열릴 예정인 이 전시에는 자신이 군위안부였다고 밝힌 일본인들의 사연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전후라는 분석이 많다. 당시 일본군의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고 서구 사회에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이 계기였다는 분석이다. 일본 군부가 병사 성폭행 사건 방지 차원이라며 위안소를 제도화했고,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시아 각국 여성들이 위안부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도 주로 빈곤한 가정의 여성들이 위안부 피해를 입었다.

일본이 2차대전 패전 뒤 보통의 정숙한 여성들을 지키겠다며 미군 대상 위안소를 만들었던 내용도 전시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전시에서는 일본이 어떻게 여성의 성을 ‘관리’하고 피해자가 침묵하는 구조를 만들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위안부 문제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 공방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세미나 막바지에 가와다가 “이것은 인권의 문제”라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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