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27 19:18
수정 : 2012.07.2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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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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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제왕적 대법원장과 후보추천위
정당성 위기 드러낸 일대 사건
하마터면 대법원은 이번에 큰일을 당할 뻔했다. 예정대로였다면 8월1, 2일 대법관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됐을 것이다. 야당이 김병화 후보자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한 터였으니 날치기 따위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당탕 소란스러운 가운데 억지로 임명동의안이 통과된다고 한들, 온전한 동의는 아니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는 것이니, 사법부로선 망신 이상의 위기다.
그런 위험은 26일 김병화 후보자의 사퇴로 일단 사라졌다. 여야는 30일 나머지 후보자들의 청문보고서를 채택해, 8월1일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표결은 평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대체 후보를 찾는 절차도 곧 시작된다. 하지만 그걸로 다 된 것일까. 걸림돌이 사라졌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안이하게 여길 일은 아닐 성싶다. 이번 사태는 사법부가 처한 정당성의 위기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일대 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사법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말은 진작부터 있었다. 우선은, 대통령이나 국회와 달리 사법부가 선거에 의해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한 것도 사법부에 간접적으로나마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에 대해선 선거를 거치지 않았다고 정당성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반론이 있다. 승자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선거를 거치지 않는 것이 사법부의 본디 역할인 소수자 보호에 적절하며, 민주적 정당성은 그렇게 국민의 신뢰를 얻음으로써 확보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과 관련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아 정치적 영향을 받기 쉬운 대법원장이 아무런 견제 없이 대법관 후보를 임명제청하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2003년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설치되고 지난해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로 승격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겠다.
그런 정당성의 근거들이 얼마나 허술한지는 이번 ‘김병화 사태’를 통해 숨김없이 드러났다. 추천위부터 제구실을 못했다. 대법원장에게 추천된 13명 가운데 고려대 출신이나 검찰 몫은 있었지만, 여성은 없었다. 교수나 여성 등은 외형적 분류일 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고려대 출신이나 검찰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익집단으로 비치는 게 현실이다. 이번에도 검찰은 김병화 후보자 지원을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조직적으로 전화를 하는 등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법무부 장관이 추천한 검찰 출신 명단에서 누가 봐도 국회 동의가 어려운 사람을 빼고 나면 남는 사람은 김 후보자뿐이기도 했다. 사실상 법무부 장관이 제청권을 행사한 셈이다. 추천위는 나눠먹기식 밀실추천의 통과장치에 그쳤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대법원장 제청-대통령 임명의 과정도 나눠먹기가 의심된다. 대법원 안팎에선 임명제청된 후보자 4명 가운데 대법원장과 대통령 몫이 각각 2명이라는 말이 공공연했다. 대법원장 몫이라는 것도 결코 정상적일 수 없거니와, 대통령 몫이 또 있다면 사법부 구성에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게 민주적 정당성의 간접적 부여는 아니다. 더구나 대통령 몫으로는 검찰 출신과 대통령의 대학 동문이 지목된다. 정의(justice)의 상징이어야 할 대법관이 자질과 실력보다 학연·지연 따위를 기준으로 뽑힌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권력과 가까운 탓에 발탁된 이들이 소수자 보호에 나설 리도 없다. 이쯤 되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민주적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대법관 후보자가 사상 처음으로 낙마한 것이 위기는 아니다. 미국에선 대법관 후보자가 상원의 임명동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비율이 약 20%다. 사법부의 위기는 그보다 법원이 제대로 구성되는지 의심받는다는 데 있다. 대법관 임명의 제도와 관행의 전면적 개선에 당장 나서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검찰 몫이니 고려대 몫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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