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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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31년 전 사다트 암살 직후 같은 긴장좌파-구세력 합세해 무르시 뒤엎나 ‘아랍의 봄’이 피하고 싶던 숙제에 결국 직면했다. 사실 30여년 전에 유예했던 숙제였다. 1981년 10월6일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 등 지도부는 수에즈운하 국유화 기념식에서 군사 사열을 하고 있었다. 사열대를 지나던 군인들이 대통령 연단으로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다. 사다트 등 11명이 사망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부통령은 간신히 암살을 피하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범인들은 군부 내 이슬람주의 장교로 밝혀졌다. 이슬람주의 세력, 특히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피의 탄압이 몰아쳤다. 사다트 시절 무슬림형제단은 이미 불법화된 상태에서 1300여명의 대원이 투옥중이었다. 암살범 재판에 이슬람주의자 300여명이 회부됐다.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에 이어 현재 알카에다 지도자가 된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이집트 정권은 붕괴 위기였다. 미국 중동정책의 야심작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도 붕괴 위기였다. 사다트는 2년 전 아랍권에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캠프데이비드평화협정을 주도한 뒤, 국내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고립에 처했다. 평화협정 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병합하고, 서안지구에서 정착촌을 확대했다. 이라크 핵시설도 폭격했다. 무슬림형제단 등 국내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협정을 배신이라고 격렬히 반대했고, 아랍 국가들도 이집트를 아랍연맹에서 축출했다. 이집트는 제2의 이란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주축이 된 이슬람주의 세력이 이란식 이슬람혁명으로 집권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다트의 암살은 모든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정권을 승계한 무바라크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다시 잠재웠고, 중동평화협상도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의 세속주의 정권들도 이슬람주의 세력의 부상을 우려하며, 이집트를 다시 지원했다. 사다트의 유족들은 나중에 그 암살이 무바라크가 공모한 국제적인 음모라고 폭로했다. 당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사다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암살 현장에서 경호원들이 수수방관했고, 무바라크만 유독 살아남은 것 등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다. 최근 출간된 <잃어버린 군대를 찾아서> 등 저서는 사다트 암살이 무바라크가 공모한 음모라고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어쨌든, 사다트 암살에 이은 이슬람주의 세력의 대대적 탄압은 당시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선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 운동과 합쳐지며, 이슬람주의 세력이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본격적으로 바꾸는 기점이 됐다. 그 뒤 30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에서 기원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아랍 세속주의 정권과 미국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세력을 더 넓혔다. 결국 아랍의 봄 뒤 아랍 최대국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들어서고, 그 정당인 자유정의당은 의회 다수세력이 됐다. 중동에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대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르시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로운 헌법 제정 때까지 대통령 칙령이 최고 권위를 갖는다고 발표하면서, 이집트는 무바라크 전 대통령 타도 시위에 버금가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12월2일을 기점으로 이 사태는 더 격화될 것이 확실하다. 이날 최고헌법재판소는 현재 신헌법을 기초중인 헌법회의의 해산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 해산 결정을 내릴 것이다. 사법부가 의회와 헌법회의를 해산하지 못하도록 한 무르시 대통령의 칙령과 정면충돌한다. 무바라크 타도에 나섰던 자유주의 및 좌파 정치세력과 시민사회는 이제 군부와 사법부 등 무바라크 구체제 세력과 결합해, 이슬람주의 세력과 대치에 나선 상황이다. 중동에서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은 이미 이란과 터키에서 집권중이다. 터키에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세력은 타협을 했으나, 현재 이집트에서 그런 타협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혼란이 지속되면, 이란식 이슬람혁명이나 구체제 복귀라는 극단적 길로 갈 우려가 크다. 아랍의 정치사회 체제를 선도한 이집트는 다시 이슬람주의냐, 세속주의냐라는 중동의 본질적 숙제를 다시 맡았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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