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석진환입니다. 오늘은 말씀드릴 내용이 많아, 공손한 인사 대신 친절한 설명 바로 들어갑니다, 꾸벅.
지난 4일 열린 ‘박근혜-문재인-이정희’ 대선 후보의 텔레비전 토론회 보셨나요? 투표일을 보름 앞두고 처음 열린 토론회여서 많은 분이 지켜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두 유력 후보는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토론회의 ‘변수’로 예상됐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주인공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주인공이 매력적이었는지 아니면 ‘비호감’이었는지는 시청자들이 판단하실 몫입니다. 다만 ‘1% 지지율도 되지 않는 이 후보가 저 토론회에 왜?’라는 의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후보 지지자들이나 보수언론은 ‘1%짜리 후보가 토론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화를 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참에 대통령 후보 토론회 참가 기준이 뭐고, 과거엔 어땠는지 등을 설명드리려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멀리 미국의 오바마와 롬니의 치열한 ‘맞짱 토론’을 한국 대선에서도 기대하시는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실망하실 겁니다.
4일 토론회와 오는 10일, 16일 예정된 세 번의 토론회는 모두 ‘공직선거법’이 규정한 법정토론회입니다. 선거법 82조는 대통령 선거 때 후보자 토론회를 3회 이상 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참가 자격은 △국회의원 5명 이상인 정당의 후보자 △직전 대선이나 비례대표 투표에서 3% 이상 득표한 정당의 후보 △여론조사 지지율 5% 이상 후보,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만족시키면 됩니다.
이정희 후보는 의원 5석에 지난 총선 비례대표 투표에서 10.3%를 득표한 통합진보당 후보여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합니다. 국회의원 6명의 진보정의당 심상정 전 후보나, 지지율이 높았던 안철수 전 후보가 등록을 했다면 토론회에 나왔겠지요.
선거법 82조의 이런 조항은 소수 정치집단에도 발언권을 보장해주려는 취지로 2004년 개정됐습니다. 그래서 2007년 대선 토론회는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이인제, 문국현, 권영길 후보까지 6명이나 참석했습니다. 지난 4일 토론회보다 더 어수선했겠죠? 2004년 선거법 개정 전에는 중앙선관위 산하 대통령선거방송위원회가 기준을 정했습니다. 교섭단체(의석수 20석)의 후보이거나 여론조사 지지율 5%가 기준이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2002년 대선 토론회에는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후보가 참석했습니다.
2002년 권영길 후보의 참여도 소수 정당의 권리 보장을 위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텔레비전 토론회는 1997년 처음 도입됐는데, 당시엔 유력 후보였던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명만 참여하고, 국민승리21의 권 후보는 배제됐습니다.
이번 이정희 후보 사례를 들며 대선후보 토론회 참가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주장은 1997년 이후 텔레비전 토론 규정 변천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입니다. 소수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발언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첫 토론회 이후 많은 유권자들은 박근혜-문재인 두 유력 후보의 양자토론을 보고 싶어 하는 게 사실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박근혜 후보만 동의하면 방송사들은 내일이라도 중계를 할 겁니다. 그런데 박 후보는 양자토론을 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2007년 대선 때의 이명박 후보보다 ‘토론 기피증’이 더 심각합니다. 참고로 1997년 대선 때는 텔레비전 토론회 54회, 2002년 27회, 2007년 11회 열렸습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토론 기피가 박 후보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닙니다. 과거 수많은 토론회가 열렸지만 1~2위 후보의 ‘맞짱 토론’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1위를 달리는 후보는 텔레비전 토론을 싫어합니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 때문이죠.
박근혜 후보가 양자토론을 수용한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또 있습니다. 2007년 대선 때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지지율 10%’를 기준으로 이명박-정동영-이회창 후보의 이른바 ‘빅3 토론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당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반발해 법원에 토론회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토론회는 무산됐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양자토론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합니다. 문 후보와 연대할 의사가 있는 이정희 후보가 사퇴하는 것입니다. 워낙 예민한 문제이고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더구나 요동치는 ‘선거판’에서, 섣부른 예측은 금물입니다.
석진환 정치부 정당팀 기자 soulfat@hani.co.kr
[김뉴타 201] ‘안철수 어시스트’ 문재인 역전골 터지나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