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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19 20:27 수정 : 2013.04.19 20:27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은밀한 호황 - 불 꺼지지 않는 산업, 대한민국 성매매 보고서>
김기태·하어영 지음, 이후, 2012

저자들도 알리라. 성 산업이 은밀하지 않다는 것을. 주차된 승용차, 전봇대, 건물 벽마다 붙어 있는 전단지들. 1967년 브루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 업무로 서울 반도 호텔에 묵었다가 한국인들의 집요한 성 구매 권유에 곤혹을 치렀다.(<뉴욕 타임스> 1990년 6월25일자) 지금은? 한국의 성 산업은 미국을 넘어 구매, 판매 모두 국제적으로 성장했다. 성 산업은 노골적으로 호황이다. ‘상품(여성)’ 조달에 폭력도 불사하는 공격형 산업이다.

2010년 한국 사회의 ‘화대’는 7조원. 같은 해 영화 산업 매출 1조2천억의 5배를 넘는다(58쪽). 이 책의 미덕은 성산업에 개입된 인구와 자본, 규모, 형태, 지구촌을 누비는 한국 남성의 성 구매까지 모든 영역의 심각성을 ‘충분히’ 일깨웠다는 데 있다.(성매매 형태는 이 책의 내용보다 다양하다.)

나는 이 책의 수치를 믿지만, 믿지 않는다. “모든 통계는 거짓말”이지만 특히 성(性)과 성별 사안은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여성문제’는 인식 부재에다 주로 비공식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 실태는 일단 축소보고(under report)된다고 보면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를 소수자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수자 개념의 문맥에 대해 설명하고 이렇게 되묻는다. “저를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제가 당신과 다르다면 그 차이는 누가 정한 건가요?”

‘객관적’, 이론적, 정치적으로 어떤 개념이 맞지만 경험자가 그 명명을 거부할 때 바람직한 ‘해결’ 방식은 무엇일까? 특히 그 개념이 사회적 낙인일 때. ‘일본군 위안부’는 흔히 정신대라고 부르는 역사에 대한 임시 용어다. 정확히 말해,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전쟁 범죄는 성노예(sexual slavery)지만 이 단어를 반길 ‘할머니’는 없다.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와 ‘창녀’에 대한 숭배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성 산업을 경험한 여성은 말한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을 들은 건 경찰서가 처음이었어요. 평소에는 몸 파는 년, 창녀라고 하면서 갑자기 또 성매매 여성, 피해자라고 하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더라고요. 생존자라는 말도 싫어요. ‘내가 죽다 살아났나요’(강조는 필자), 왜 생존자라고 불러?”(149쪽)

이들은 ‘구조된’ 사람인가? 무엇으로부터? 그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희생자화, 타자화에 저항하면서 피해자 대신 생존자(survivor)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윤락녀에서 피해자로, 생존자로, 성 판매 여성으로. 이 변화가 사회운동이었다. 하지만 아직 당사자가 정의한 용어는 없다. 아마 현재로서는 성 노동자가 유일할 것이다.

성 판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중노동이다. 그러나 나는 ‘성 노동’에 반대한다. 노동이되 ‘어떤 노동’이며, 수천년간 왜 ‘여성 직종’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된 노동을 두고 “노동이다 vs 아니다”를 논하는 이 사회의 지성이 민망하다.

탈식민 이론가 스피바크는 “민중(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당사자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조건 옳거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각 역시 사회적 산물이다. 어떤 여성은 ‘생존자’보다 ‘성 노동자’에 더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대다수 민중에게(나에게) 노동과 폭력, 괴로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문맹을 포함, 누구의 언어도 투명하지 않다. 문제는 약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공유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량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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