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28 20:17
수정 : 2013.06.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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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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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망명객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제 신문에 기사를 쓰지 못하고 이렇게 <한겨레> 지면을 통해 독자와 만나야 하는 형편이니 말입니다. 아, 저는 <한국일보> 이성택 기자입니다. 2011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경찰팀을 거쳐 현재 법조팀에 몸담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숙취를 이기지 못해 아침부터 기자실에서 졸기도 했고, 가끔 낙종도 했습니다. 그래도 매일 ‘내일은 뭘 쓰지’ 고민하며 발바닥에 땀 나게 취재 다녔습니다. 편견과 주관보다는 냉철한 기자적 시각을 유지하되, 강자보다는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애썼습니다. 내심 뿌듯한 기사를 쓴 날엔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낙제점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자평해 봅니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1년차 막내부터 논설위원까지, 180여명의 기자가 찬 바닥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신문에 오롯이 청춘을 바쳐온 선배와 성실한 동기, 후배가 눈에 들어옵니다. 펜 하나만 쥐면 펄펄 뛸 수 있는 실력과 근성을 갖춘 이들입니다. 신문 제작 거부나 파업을 한 것도 아닌데 일터를 빼앗긴 지 오늘로써 15일째. 경영진과 신임 간부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는 내용의 ‘근로제공 확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죄’였습니다. 이곳은 한국일보사가 세든 서울 소공동 한진빌딩의 1층 로비입니다.
지난 26일은 월급날이었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월급이 3분의 2만 들어왔습니다. 홀몸인 저도 휑한 월급명세서가 쓰라린데, 가정이 있는 기자들은 눈앞이 얼마나 캄캄했을까요. 평생을 신문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선배들이나 출장비나 야근비 한번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하고 제 돈 써가며 이 악물고 취재해 신문 만들었던 동료 기자들입니다. 이들이 ‘기자답게 살려고 했다’는 것 이외엔 월급을 받지 않아야 할 이유를 떠올리기 힘듭니다. 반면 경영진은 매 끼니 도시락을 두세개씩 먹는 용역직원들 급여 및 밥값으로 벌써 수억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와중에 근로제공 확약서를 쓴 기자 예닐곱명만 편집국을 드나들며 독자들에게 내놓기 부끄러운 ‘짝퉁 한국일보’를 찍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편집국에 있는 한 선배는 후배들에게 “기자의 기는 쓸 기(記) 자가 아니라 기운 기(氣) 자다. 기자는 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기자로서 자부심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강조했던 그들은 이제 후배들을 피해 도망다니기 급급합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지지 방문을 하고,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지 성명서를 내도 경영권을 틀어쥔 언론사 사주의 벽은 여전히 높아 보입니다. 지난해 벌어졌던 <국민일보>, <연합뉴스>,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등의 파업은 하나같이 긴 투쟁 끝에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며 언론사 사주를 상대로 싸워 이기는 건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옵니다.
한국일보 사태의 끝은 다를 거라는 게 기자들 판단입니다. 1년차부터 논설위원까지 소속 기자의 95%가 넘는 수가 ‘한국일보가 망가지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단단히 뭉쳤습니다. 여야 정쟁 구도에서도 한 발짝 물러나 야당은 물론 여당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불리하지 않은 조건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일보는 좌우의 대립이 선명한 한국 언론의 현실에서 적극적 중도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가 힘이 됩니다.
쟁점도 단순합니다. 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4월 신문사 재산인 중학동 사옥 우선매수청구권을 비밀리에 처분해 개인 빚을 갚는 데 사용한 혐의로 장재구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경영진은 곧바로 편집국장 경질 등 대규모 보복 인사를 냈습니다. 기자들이 이에 반발해 기존 체제대로 신문을 만들어오자 경영진이 급기야 용역업체를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하고 기사 작성 프로그램 아이디를 빼앗아 기사를 쓰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경영진의 호도와 달리 인사 불만에서 비롯된 노사갈등이나, 정치적 이해가 얽힌 노노갈등으로 볼 여지는 없습니다.
초조함의 발로일까요. 경영진은 장재구 회장에 대한 노조의 고발 이후 보복 인사와 편집국 폐쇄, 주필 교체, 임금 체불 등 무리수를 잇달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대와 달리 대오를 이탈한 기자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짝퉁 신문 제작에 참여했던 인원들이 1층 로비로 속속 합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제가 즐겨 보는 코너인 ‘친절한 기자들’에 앞으론 독자로만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자답게 살아보려는 기자들이 현장에 돌아가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이성택 한국일보 사회부 법조팀 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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