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12 20:24
수정 : 2013.07.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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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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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교과서포럼이 해부한 ‘왜곡’의 진상>
박효종·최문형·김재호·이주영 지음, 기파랑, 2006
대개 “진상을 밝히겠다”는 책들은 제목이 길다. 뉴라이트 계열의 책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진보 진영,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부제에는 “교과서 이렇게 고쳐야 한다!”도 있다. 열정과 사명감이 느껴진다. 이 책은 “‘광야에서의 고독한 외침’이 사방의 메아리가 된 뿌듯한” 결실이다(12쪽).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제는 국사라는 개념 자체다. 안타깝지만 ‘교과서포럼’이든 이들과 대립하는 집단이든, 노고와 사명감에 비해 성과는 없을 것이다. 진실이 하나라면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출구 없는 방에서 산소 쟁탈전이랄까. 식민지 억압과 군부 독재 시기 참혹한 역사를 경험한 국가들이 설치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모순이다. 진실과 화해는 양립 불가능하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하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연인들 중에는 “내가 지나가는 사람이야, 아님 운명이야?”라고 물으면서 끊임없이 멋진 정답을 요구하는 타입이 있다(주로 여성들). 세상사를 ‘우연한 사건’과 ‘역사적 법칙’으로 나누고, 후자가 우월하다는 인식(역사주의)은 근대사회를 작동시켜온 주요 기제 중 하나다. 역사는 시간의 스토리, 즉 직선적 시간에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는 시계와 같다는 논리다(물론, 그렇지 않다).
이 책은 현대사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자기 비하와 외눈박이 평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부친 살해의 역사쓰기”(27쪽), “교과서의 오염 그 끈질긴 관성”(102쪽)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은 ‘이승만 건국’과 ‘박정희 산업화’가 자랑스럽다(자랑스러운 것은 좋은데, 그들이 했던가?). 미국에의 종속이나 독재 운운은 자학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인식은 자랑스럽든 창피하든 통일된 의견이 있을 수 없다. 구성원 각자가 경험한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나 산업화 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겪은 이들의 역사를 타인이 규정할 수 없다. 지식인이 할 일은 남의 경험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지식인의 사명감?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겨우 사명이란 말로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 알아서 하면 되지 사명으로 선포할 일은 아니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맨틱’한 사건”(박효종, 66쪽)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間奏),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正史)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적 운명이 건국과 산업화인지, 민주화와 통일인지는 모르겠다. 공통점은 있다. 둘 다 국민 합창을 강요하는 불협화음의 논리다.
역사적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상’과 ‘왜곡’은 타자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다. 어떤 사람에겐 성폭력이 술김의 실수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겐 성별화된 역사의 구조적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겐 고문과 도청이 업무상 착오지만, 국가의 본질로 인식하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너의 경험은 사건, 나의 경험은 역사? 역사는 누군가의 에피소드일 뿐 보편적이지 않다. 사건과 역사의 구분은 폭력이다. ‘시맨틱’한 용어로는 편집증(paranoid)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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