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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9 19:44 수정 : 2013.07.19 19:44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문화의 위치-탈식민주의 문화이론>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소명출판, 2002

나는 신문사나 출판사의 교열 편집자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들이 나를 싫어할 만큼 유명하거나 글을 많이 쓰는 것은 아니고 나 혼자 흥분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내가 글을 못 쓰는 사연만큼이나 많다. 부족한 국어, 상호간 무식, 내 글은 낯설다는 편견과 자격지심….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타입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이 지면의 마감은 수요일인데 나는 일요일에 보낸다. ‘빨간 펜’ 교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지적해주면 무임승차,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실은, 하소연만 하다가 사과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달력이지 필자의 뜻이 아니다. 전달에 실패했는데 내 의견이 무슨 소용인가.

최근 내 글에 한글 외 문자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는 불필요한 영어나 한문을 쓴 적이 없다. 불가피할 때만 괄호 안에 넣는다. 한글 전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뿐, 반대하지 않는다. 한글 단어의 80%가 한자다. 한자를 모르면 국어가 불가능하다. 그런 한글조차 ‘평화’라는 단어처럼 식민지 시기 일제가 영어를 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자로 옮긴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것이 우리말이다. 나는 이러한 역사가 창피하지 않다. 순수한 문자는 없기 때문이다.

한글은 표음문자라 표현에 제약이 있다. 몇 해 전 구제역 파동 때 내가 기억하는 한 어떤 매체도 한자, 영어 표기를 하지 않았다. 피해 농가 외 구제역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알아야 걱정도 같이 하지. 구제역(foot-and-mouth disease, 口蹄疫)은 발굽이 네 개인 동물이 입 주위에 생기는 병이다. ‘구’와 ‘제’에 병이 났다는 얘기다. 나는 이 사실을 시엔엔(CNN) 자막을 보고서야 알았다. 이때 한글 전용은 문맹화 정책이나 다름없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여러 문자를 혼용하기 때문에 ‘우수하다’. 표음어와 표의어가 상호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글과 한자. 일본어는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장음까지 네 개 문자로 표기한다. 당연히 표현은 섬세해지고 번역과 소통이 쉽다. 일본어 노벨 문학상이 우연이 아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다 알 것이다. 운전면허 없는 나는 잘 모르지만 두 개 이상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에너지 절약 차라고 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국정홍보처의 정기 간행물에도 남발되는 말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잔재는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일부분이다. 과거 청산은 수사학일 뿐 불가능하다. 공식적인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식민 콤플렉스에 시달리거나 반대로 우월의식에 젖은 억압자에게 바바는 묻는다. 세상이 너와 나, 식민지와 피식민지,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되는가? 현재는 상호 작용의 결과다. 지배-피지배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미 섞였고 변했다. 경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바바는 지구화를 다문화주의나 이국성이 아니라 혼성성으로 개념화한다.

우리는 백제가 일본에 준 영향은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왜 우리는 무균 상태이길 바라는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사용하면서, 불가피한 한자 병기가 그렇게 문제인가. 한글 전용을 존중한다. 다만, 생각하자는 것이다. 삶의 잡종성을.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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