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조공국에서 국민국가로>
기무라 간 지음, 김세덕 옮김
산처럼, 2007 천동설, 세계는 한국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위 글귀의 주인공은 이승만이다. 누가 이런 당황스러운 생각을?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아 미리 적어둔다. 8월이 간다. 5월과 8월은 민망한 계절이다. ‘감사의 달’의 상술과 ‘민족의 한’이, 때를 기다린다. 민족이 성찰과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의 기억으로만 한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가 이득을 볼까. 나는 한국이 일본에게 좀 무관심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가해자는 뻔뻔한데 한쪽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좌절, 절망, 원한을 순환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추락하기 쉽다. 우리 사회에는 미국을 이용하자는 입장과 자주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 “사대주의”, “종북”이라며 자신의 이슈로 정치를 독점하는 적대적 공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과는 둘 다, “국가는 하나”라는 내셔널리즘을 강화한다(내셔널리즘은 번역하기 힘든 용어다. 이 책의 ‘내셔널리즘’ 표기를 그대로 적는다). 약자가 강자를 이용한다는 논리는 설득력도 없고 성공 확률도 적다. 그러나 한국은 ‘성공’했다. 이 책은 일본인 연구자가 한국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분석한 책인데, 특히 ‘친미’ 세력의 사고방식 분석이 탁월하다. 유교 사회의 국제 관계 규범은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하고(자소)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사대)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이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국제(인터-내셔널)사회는, 신식민지 통치는 있을지라도,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의 개별성을 전제한다. 사랑, 보호, 섬김 운운하는 사대자소의 원리와는 다르다. 그러나 남한의 지배 세력은 사대자소를 한미동맹으로 응용(?)하여 해방 이후 유일한 대외 정책으로 삼아왔다. 2004년 9월, 당시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가 “미국은 한국과 수평적 관계를 맺을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한국은 준비가 되었는가?”라고 발언하자, 조선일보 사설은 이렇게 반박한다. “강대국과 상대적 약소국 간의 동맹은 기본적으로 비대칭적이다. 주도하는 국가가 있으면 뒤따르는 국가도 있는 것이다. 이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강대국은 동맹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따른 대가(代價)를 치른다.” 미국은 한국더러 “독립하라”는데, 우리는 “책임지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용미(用美) 세력을 자처하는 이 중에는 불평등의 극치인(특히, 환경파괴!) 한미동맹을 남한의 공공재, 주한미군을 우리의 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은 대개 패권주의를 지향하는데 한국은 소국의식(小國意識)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이승만은 대국에게 원조를 ‘간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책임과 한국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뼛속까지 친미였지만 미국에 대한 당당한 태도는 존 하지(미군정 최고 책임자)가 “미국의 적”으로,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의 일기에 이승만을 “개자식”(son of bitch)이라고 쓸 만큼 골칫거리였다. 여기서 한국은 강대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국제사회에서 선악을 판단할 권리는 약자인 한국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모르는 강대국에게 할 일을 ‘가르치는 높은’ 위치에 있다(390~394쪽). 천동설(天動說),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강대국은 불쌍한 한국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강자를 지도하는 자부심의 근거다(402쪽).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다음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웃는 사람(사실, 웃기다). 절박하게 동의하는 사람. 나처럼 이 희비극 앞에 한숨 쉬는 사람. 더불어 이 책의 제목과 대구를 이루는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가 생각났다. 나는 ‘분단 조국의 국민으로서’ 씁쓸했다. 비단과 여성을 바쳤던 고려시대부터 이라크 파병과 고철(무기), 옥수수 쇠고기 강매까지 사대는 결국 조공(朝貢), 자발적 종속이다. 이 책은 ‘친미’뿐 아니라 한국의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평등보다 사대자소(한미동맹)가 더 현실적이라는 사고방식의 결과는? 일상에서 강자는 미국이 아니라 남성이다. 한국 사회는 사대할 뿐 자소에는 무능하고, 사대의 스트레스를 약자에게 해소한다. 아닌가? 정희진 여성학 강사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