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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7 20:38 수정 : 2014.02.07 21:30

친절한 기자들

한겨레 토요판팀 최성진입니다. 매주 한겨레 편집국 소속 기자들에게 ‘친절한 기자’(친기자)로 나서주길 부탁(또는 강요)하면서 정작 제가 직접 친기자였던 적은 없습니다.

이렇듯 불친절했던 제가 이번주 친기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선 이유는 지난 4일 불거진 좌경맹동주의 논란 탓이었습니다. 좌경맹동주의라는 단어의 사용 여부를 놓고 사상검증을 벌이는 현실을 지켜보며 말과 글을 다루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만,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이번주 친기자 쓸 사람이 없었구먼’이라고 이해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좌경맹동주의 논란은 4일 오전 <문화방송>(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신동호의 시선집중>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 인터뷰 편’에서 비롯했습니다. 하루 전이었던 3일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석기 의원에 대해 검찰이 징역 20년을 구형한 일이 있었는데요, 같은 당 소속 김재연 의원에게 이에 대한 반응을 듣겠다는 것이 인터뷰 취지였습니다. 진행자였던 신동호 아나운서가 갑자기 김 의원의 사상검증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신) 어제 이석기 의원이, 좌경맹동주의라는 용어도 사용했는데 이거 지금 우리가 안 쓰는 말 아닙니까? 북한어로 알고 있는데요.”

“(김) 그건 사회자께서 그렇게 추측하시는 것 같고요.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김 의원께서는 좌경맹동주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판단하시나요?”

“(김)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 아, 좌경맹동주의를 우리 일반 국민들이 쓰고 있는 단어다….”

한국 사회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좌경’이니 ‘우경’이니 하는 말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문제는 맹동주의라는 낯선 개념어였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맹동주의라는 단어의 뜻풀이를 찾아보았습니다. “[명사]아무런 원칙과 주견이 없이 덮어놓고 남이 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국립국어원 국어생활상담실로 전화를 걸어 표준어 여부도 물어봤습니다.

“표준어 맞습니다. 국어대사전 초판본까지만 해도 맹동주의는 북한어로 등재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사전을 개정할 때, 이를 북한어가 아니라 표준어로 인정했습니다. 북한은 물론, 한국에서도 흔히 쓸 수 있는 말이라고 본 것이죠.”

좌경과 맹동주의라는 두 개의 명사가 결합한 형태의 좌경맹동주의는 국어대사전에 없었습니다. 표준어도, 북한어도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좌경맹동주의는 어디서 나온 말인지, 김재연 의원에게 7일 직접 물어봤습니다. “운동권에서는 ‘좌편향적 맹동주의’ 정도의 의미로 좌경맹동주의라는 표현을 종종 써왔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좌경맹동주의의 의미와 출처 등을 살펴봤지만, 사실 이 논란의 본질은 용어의 국적이 아니었습니다. 남북 분단 이후 극우세력은 이런 식의 논란을 즐겨 왔습니다. 특정 용어를 북한이 즐겨 쓴다는 사실에 포착해, 해당 단어를 꺼낸 사람을 ‘종북주의자’ 혹은 ‘빨갱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낙인찍는 일 말입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1년 3월에도 지금과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교육부는 공교육 붕괴에 대한 대안으로 ‘창발성 교육’ 강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보수적인 교원단체인 교총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교총은 ‘창발성 교육,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창발성이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주로 쓰는 개념이라며 교육부를 공격했습니다.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은 아예 한완상 당시 교육부총리를 겨냥해 “북한 용어까지 쓰는 것만 봐도 한 부총리의 친북·좌파적 편향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단지 북한이 (더 많이) 쓰는 말이라는 이유로 특정 단어의 사용조차 범죄시·금기시하는 ‘한국식 마녀사냥’은 한국 대중으로부터 ‘인민’과 ‘동무’, ‘동맹’이라는 단어를 빼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인민 대신 국민을 쓰지 않으면 종북주의자처럼 보이고, 친구나 연맹을 동무나 동맹이라고 부르면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창발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요. 아, 북한의 국호인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일보> 직원도 아닌 주제에 “나는 조선을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는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 직후 “조선은 빨갱이 말이니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했거든요.

최성진 토요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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