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십니까. 일본 도쿄에서 근무중인 길윤형 특파원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인사드린 게 거의 반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9월 도쿄에 부임한 뒤 반년이 못 되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일로 범위를 좁혀봐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 문제,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못 박은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 그리고 현재는 위안부 동원 과정에 군이 개입했음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의 검증 국면에까지 와 있습니다. 커다란 뉴스들이 거의 매일처럼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심신미약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얘기를 나눠볼 주제는 고노 담화입니다. 정식 명칭은 ‘위안부 관계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내각관방장관 담화’로 1993년 8월4일 발표되었습니다. 이 담화를 발표한 인물이 당시 미야자와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었기 때문에 흔히 줄여 ‘고노 담화’라고 말합니다. 담화는 일본군 위안소가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됐다”고 인정했고, 위안부는 감언이설, 강압, 관헌들의 가담 등을 통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고”,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심한 상처를 입힌” 일에 대해 정부는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다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마무리 부분에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영원히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도 밝히고 있습니다. 전문이 읽고 싶으시면 인터넷에서 쉽게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담화가 발표된 1990년대 초는 한국에서 식민지 역사 청산에 대한 요구가 물밀듯 들끓어 오르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위안부 운동과 관련해선 1990년 1월 <한겨레>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의 취재기가 발표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여름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이 처음 공개됩니다. 여기에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학 교수가 위안소의 운영과 관리 과정에서 일본군이 직접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낱낱이 공개되자 견디지 못하게 된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합니다. 그런데 뭐가 또 문제일까요. 현재 논란의 핵심은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군이 얼마나 관여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위안부가 군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여성들이 군의 선박으로 운송됐으며, 군이 관리하는 위안소에서 하루에 많게는 수십명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가 부인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료에 의해 명명백백히 드러난 사실이니 부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다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생각하듯) “군이 직접 혹은 업자를 시켜 길 가던 소녀를 20만명이나 납치해 위안소로 끌고 가는 식의 모집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업자가 감언이설이나 폭력을 행사했을 수는 있으나 정부가 한 것은 아니니 우리 책임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 부분에 대해 고노 담화는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여 “관청 등이 가담한 사례도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현재 일본 정부가 ‘동원 과정’의 문제에 집착해 이를 부정하려는 것은 국가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시 위안소의 운용은 일본의 법령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위안소 설치 자체가 명백한 인권침해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당시 일본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게 일본의 주장입니다. 일본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도의적 책임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군이 직접 소녀를 납치해 위안부를 동원했다고 하면 이는 당시 일본 국내법을 어긴 것이 되고 결국 법적 책임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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