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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8 20:30 수정 : 2014.04.18 20:51

정희진의 어떤 메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지음
홍영의 옮김, 문학관, 1990

톨스토이의 우화 제목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드라마나 영화, 일상적 제호로 종종 동원된다. 얼마 전 신간 <좌파로 살다>(유강은 옮김) 출판 기념 토론회가 있었다. 책은 좋았지만 행사 현수막 글귀부터 그 자리에서 빈번히 오간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말이 불편했다. 나는 “~ 무엇으로 사는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식의 표현이 싫다. 다소 허세가 느껴지는 고뇌, 진부함, 고정된 위치성 때문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 섹스>(Intercourse)다. 책 내용을 고려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번역이 아니라 둔갑이다. <좌파로 살다>(Lives on the left)도 “무엇으로 사는가”와 무관하다. 어떠한 노선에 있음(on)을 의미한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를 전공자에게 확인하는 것이 도리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어판 제목은 한글 직역 그대로 다. by(~에 의해서)는 행위의 유발이나 방식 등 수동적인 의미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과 그것을 추동시키는 무엇이 있다는 발상이다. ‘좌파’를 삶의 부분적 노선이 아니라 존재 증명서(정체성)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우문이다. 우답을 불러오는 노동 없는 고민이다. 무엇이 당신을 살게 하는가. 가족, 돈, 입신양명, 신념? 그러다가 살다가 그 대상이 사라진다면?

전세계적으로 좌파의 의미, 특히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세력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그들의 잘못’, ‘이론 자체의 문제’는 어느 사상이나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다. 자본주의는 대처 불가능할 만큼 매일 변신하는 괴물이 되었다. 자기 외부에서 부여된 진보의 가치에 기대어(수동성) 자칭 ~주의자로서 “내가 누군데!”라는 자의식(능동성)으로 살아온 이들에겐, 자기모순이 내파하는 시대다.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by) 것이 아니다. 의미는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 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이 글의 요지는 “~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은 책의 내용과 무관할 뿐 아니라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원제 그대로 쓰자면 <삽입 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으로 여기서 급진적(radical)은 발본적(拔本的)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는 대부분 좌파였다. 196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과 시민권 운동 과정에서 좌파의 성폭력과 인종차별에 질린 이들은, 자유주의와 그 비판에서 시작한 마르크스주의를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좌파의 한계는 이미 50여년 전 여성주의자와 흑인운동가들이 ‘골백번’ 썼으며, 이에 힘입어 탈식민주의에 의해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물론 자본주의의 성격이 달라진 것도 큰 이유다. 스피박 같은 페미니스트이자 마르크스주의 탈식민주의자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고 현재 탈식민이론은 ‘주류’ 사상이 되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신 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 리는 없다.”(<좌파로 살다> 중, 에른스트 블로흐)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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