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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3 20:29 수정 : 2014.05.23 20:53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지음, 솔, 1994

지난 4월16일 나는 일본에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16일 밤 교토에서 티브이로 접했다. 경험한 이들은 알겠지만 일본의 방송 보도는 자국 소식만큼이나 남한, 북한, 중국 뉴스가 많고 상세히 다룬다. ‘세월호’도 한국의 인터넷 뉴스보다 빨랐다. 남의 나라 사고인데도 좌담회를 열고 시뮬레이션 방송까지 했다. 체류 내내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놀랍다는 의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학기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학생 중에 탈북자가 있다.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수능을 치르고 입학한 경우다. 탈북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한 사회가 익숙하지 않은지, 그 학생도 계속 “(북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일본 방송과 마찬가지로, 사건 자체도 충격이지만 주로 당국의 대처와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건 이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내 일상을 압도한다. 이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 인생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희망과 현실의 차이일 뿐이다.

치유는 부정-두려움-분노-우울-수용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는 공식도 아니고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지만 고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충격 이후 첫 반응인 부인(denial) 단계가 가장 길고 논쟁적인 시기다. 기억의 봉인, 망각은 정치적인 것이다. 현실 부정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방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오래갈수록 문제가 된다. 부정 단계가 지나가고 “그 일은 일어났다”를 인정한 후에도 분노와 슬픔이 절로 조절되는 것은 아니다.

박완서. 다른 독자들처럼 나도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특히 <엄마의 말뚝>, <나목>, <휘청거리는 오후>,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둑맞은 가난>은 이 지면에 쓰려고 아껴둔 작품으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혼자 웃곤 했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지만 오래전에 다른 지면에 쓴 <한 말씀만 하소서>를 또 쓰고 있다.

작품의 형식은 일기다. 1990년대 초 월간지 <생활성서>에 연재되었고 1994년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뜻)의 모태이자 연작이다. 아들을 잃은 그녀에겐, 울음을 참고 살아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 하는데 통곡의 벽이 우는 세상이다. 당시 <생활성서> 정기구독자였던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곧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다. 읽는 나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작품의 대부분은 현실 부정의 고통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이것은 삶의 본질이다. 무엇보다 사람마다 있을 수 없는 일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소한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세월호 사건은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일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의 연쇄다. “잊지 말자”는 다짐,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은 가슴 아픈 모순이다. 고통이 사건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세월호’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나는 오랜 무기력과 좌절, 우울도 극복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빨리 털고 일어나야” 식의 인식이 바로 세월호 사건의 원인이었다. 바람직한 유일한 방법은 없다. 사회적 인식, 개인의 상황에 따라 넘을 수 있는 고통의 문턱, 역치(閾値)는 사람 숫자만큼의 수를 갖고 있다. 오래 아프고 울고 기운이 없거나 잠만 자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금방 일어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인가? 고난은 경험의 영역이지 승부가 아니다. ‘패배’도 일종의 대응이다.

다양한 대처 방식이 모색, 인정되었으면 한다. 그 전제는 무조건적 수용이다. 고통과 고통받은 사람을 온전히 수용(受容)하면 고통은 용해, 수용(水溶)되어 다른 물질이 된다. 고통은 몸의 생각이다. 생각은 바뀔 수 있다. 내가 소망하는 사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안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모든 고통을 안아주는, 어떤 고통도 밀쳐내지 않는 사회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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