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 4집 앨범 <컴백홈>을 발표한 직후 ‘서태지와 아이들’ 모습. 오른쪽부터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혁명 혹은 추억, 당신의 서태지는?
혁명 혹은 추억, 당신의 서태지는?
아이돌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서태지라는 거대한 산을 만난다. 스무살 서태지가 세상과 자신에 대해 노래하자 한 세대가 화답했다. 가치의 전복, 권위에의 도전, 감성의 폭발로 가득한 시대를 우리는 서태지와 함께 지냈다. 영원히 스무살일 것만 같던 그도 마흔이 됐다. ‘90년대 최고의 히트상품’이던 서태지, 그는 낯선 이방인이었나, 지나버린 추억인가, 아니면 열정적인 뮤지션인가?
‘그날이 오면’과 ‘난 알아요’의 사이에서
충격 그 자체였다. 낯섦은 이내 두려움을 불러왔다. 군사정권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1980년대 감수성에 젖어 있던 윗세대엔 더더욱 그랬다. 64년생인 이인영(47) 민주통합당 최고위원도 그중의 하나다. 1987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초대 의장이었던 운동권 청년 이인영이 즐겨 듣는 음악은 ‘타는 목마름으로’ ‘그날이 오면’ ‘녹두꽃’이 전부였다. 92년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에서 평민당과 정책연합 실무를 담당하던 그에게 서태지는 어떤 의미일까. 이 최고위원은 “진보든 보수든 기성의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반란처럼 보였다”고 당시의 충격을 회고했다. “내게 서태지는 새로운 문명을 장착한 이방인이었다.”
해직교사였던 60년생 송형호(51)씨에게도 서태지는 터닝포인트(전환점)였다. 1989년에 해직됐다 94년 서울의 한 여자중학교로 돌아온 송씨는 지금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적응하기 어려웠다. 교사 혼자 50분 동안 설명하는 수업방식에 아이들의 반응이 매우 싸늘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후반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달랐다. 식민지와 전쟁과 독재의 상처를 간직하지 않은 첫 세대였다. 경제적 풍요는 좀더 자유로운 사고를 불러왔고, 갓 피어난 디지털문화의 시각적 자극에도 이들은 익숙했다. 서태지는 말 그대로 ‘신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최고위원은 “너무나 다른 신세대 문화를 놓고 운동권 내부에서는 가치있는 문화로 볼 수 있는지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집회와 시위가 일상이던 아스팔트 세대에게 서태지는 문화적으로 억압된 시대를 드러내주는 거울이었다. ‘이방인’ 서태지는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며 신세대 곁에 섰다.
기성세대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이른바 ‘서태지 세대’라고 불리는 10대와 20대 초반 세대는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당시 14살이던 프로그래머 이광민(34)씨는 친구한테서 빌린 문화방송 <특종! 티브이연예> 녹화테이프에서 ‘난 알아요’를 부르는 서태지를 처음 봤다. “멜로디가 강렬했다.” 희열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때 서태지는 10점 만점에 7.8점을 받았다. 이씨는 친구들과 함께 낮은 점수를 준 작곡가 하광훈과 작사가 양인자, 가수 전영록, 연예평론가 이상벽을 욕했다. 이후 앨범을 죄다 구입하고 열광적인 팬이 된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10월 중간고사 전날 발매된 4집 앨범을 듣느라 다음날 수학시험에서 4점을 받은 적도 있다”며 웃었다.
자영업자 임정혁(40)씨는 대학교 신입생 독서동아리방에서 워크맨으로 서태지 노래를 처음 들었다. “깨는 음악이었다. 보컬은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넘어서는 사운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춤과 랩을 좋아했던 김영혜(34)씨는 중학교 수련회에서 1집 ‘환상 속의 그대’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생애 처음으로 2만5000원을 내고 간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도 김씨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태지의 음악은 10대를 겨냥한 상업적 음악이란 비난마저 넘어섰다.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이 겪어야 했던 악마주의(백워드 마스킹) 파문도 그의 영향력을 방증하는 증거다. 오랜 팬임을 자부하는 조은정(34)씨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많았던 사춘기 시절 서태지의 노랫말은 무언가에 반항하고 싶던 마음을 위로해줬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교실이데아’ ‘컴백홈’ 등 국내 교육현장의 문제를 다룬 노래는 ‘운동권’이 10년 동안 이루지 못한 성과를 한번에 거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너무나 다른 신세대 문화
당혹했던 운동권 내부에선
그 가치를 놓고 격렬한 논쟁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었고
투정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시대 아이콘이었다 그를 향한 열광과 ‘악마주의 파문’ 사람들이 서태지의 음악에 열광한 이유는 다양했다. 실험적 음악, 저항정신, 자아탐구…. 서태지의 음악 속에 이 모든 얼굴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태지 세대의 ‘분화’는 자연스런 과정으로 다가왔다. 대학교 교직원 최명(31)씨는 서태지를 무엇보다 ‘새로움’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최씨는 “통속적인 사랑노래도 새로운 형식으로 부르는 신선함 때문에 매료됐다”고 털어놨다. 공인회계사 박아무개(31)씨에게 서태지는 ‘호기심’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한국에 발빠르게 소개하는 서태지를 보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기대하곤 했다. 실제로 랩댄스(1집), 메탈과 국악(2집), 얼터너티브 록(3집), 갱스터 랩(4집) 등 서태지가 들고나오는 무기는 언제나 지배적인 음악형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진보적 문화평론가들로부터 ‘추상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서태지의 음악에 뚜렷한 사회적 인식이 담겨 있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을 소재로 한 ‘발해를 꿈꾸며’(3집)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비판한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4집) 등이 대표적이다. 연예인 초상권 문제를 공론화했고, 가수의 주체적인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매니지먼트사와 결별하기도 한 인물이 서태지다. 프로그래머 이광민씨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서태지의 행동에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돌아봤다.
이와 달리 임정혁씨는 “‘발해를 꿈꾸며’나 ‘컴백홈’이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공허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서태지 개인의 삶 자체에 주목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 서태지의 삶을 보면서 나는 왜 대학에 왔고 왜 공부를 하고 있나를 돌아봤다. 11살인 아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태지 오빠? 서태지씨!
90년대 후반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서태지는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존재다. 환경운동가인 한숙영(29)씨는 서태지를 ‘오빠가 좋아했던 가수’로 기억한다. 당연히 서태지에게서 저항의 코드를 읽어내지도 않는다.
2000년대 이후 사회경제적 조건도 서태지와 서태지 세대가 에너지를 분출했던 90년대 전반기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외환위기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지금의 20대, ‘88만원 세대’는 경기는 가라앉고 냉엄한 경쟁 속에 내몰려 생존만이 중요해진 세대다. 서태지 역시 사회를 비판하거나 세대의 반항을 대변하려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2012년. 어느덧 나이 마흔이 된 ‘반항의 20대’ 서태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서태지 팬이라는 요즘 10대의 고백을 들어보자. 경기도의 한 외국어고등학교 2학년인 94년생 김아무개(17)양은 “서태지씨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태지 오빠’라 하기엔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고 철없는 빠순이 같아 보일까봐 싫다”는 김양은 꼬박꼬박 ‘서태지씨’라고 표현했다.
지난 20년의 세월은 ‘10대들의 대통령’ ‘문화대통령’이라는 굴레에서 서태지를 풀어줬다. 어깨에 힘주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태지를 바라볼 뿐이다. 좋아하는 일에 열정있고 재능있는 음악 마니아. 한 분야의 전문가가 각광을 받는 시대 아닌가. 서태지는 시대의 욕망을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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