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퀄컴의 K-프로젝트 내부문서 단독입수
미국 퀄컴 본사 건물과 2016년 12월28일 퀄컴 관련 결정을 위해 열린 공정위 전원회의 장면을 합성한 모습.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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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조그만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퀄컴은 전세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통신 모뎀칩 시장을 장악한 절대 강자다. 퀄컴은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비싼 로열티를 매기고 경쟁 부품업체에는 기술 제공 의무를 거부하는 등 ‘특허갑질’을 일삼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 1차 과징금 부과에 이어 2014년 다시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며 퀄컴을 압박했다. 퀄컴 본사와 퀄컴코리아는 공정위의 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케이(K)-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정부, 국회 주요 관계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글로벌 기업의 치밀하고 광범위했던, 하지만 ‘1%’가 부족했던 로비 계획을 <한겨레>가 퀄컴 내부 문서를 단독 입수해 재구성했다.
2012년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직 맡아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비공식적 영향력 인물 알아내야” 2014년 공정위 조사 착수하자
“TPP, 방미에 부정적 영향 강조해야”
“테러 당한 리퍼트 대사 활용을”
1천억원 벤처 투자 계획도 발표 언론 보도를 통해 공정위의 조사 사실이 알려진 뒤인 2015년 3월11일, 로드리게스 상무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단기·중장기 계획을 사내에 회람시켰다. 그해 3~4월에 당장 시행할 단기 계획으로 “안호영 주미대사부터 시작해 한국 정부와 사적인 대화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 정부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후속인 티피피(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등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이 장밋빛이 아니라는 점” 등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또 “박 대통령의 방미가 10월에 예상되는데 환영받지 못할 많은 부정적 결과가 우려된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티피피는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공동체로 박근혜 정부가 참여를 희망하고 있었다. 외교·경제적 현안을 앞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문서에는 서울에서 테러를 당해 한국민들에게 미안함의 대상이 된 마크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방안도 담겼다. “최근 피습으로 앞으로 (대사 잔여 임기인) 20여개월 동안은 ‘언터처블’(untouchable, 건드릴 수 없는)이 됐다”는 것이다. 장기 계획으로는 “퀄컴코리아 대관팀과 협업해서 국회와 관련 상임위원회 핵심인물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레임덕 기간에 국회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대니얼 류 퀄컴코리아 이사는 로비 계획에 제이컵스 회장과 박 대통령의 면담 일정이 누락된 점을 지적했다. “비록 박 대통령의 인기가 식고 있지만 박 대통령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며 “박 대통령의 힘이 점점 빠지겠지만 한국 정치 시스템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믿음직하고 유일한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서는 “벤처나 연구개발 투자 같은 의제를 가지고 가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냈다. 하지만 이후 박 대통령과의 ‘비공식적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종범·조신·최경환을 움직여라 류 이사의 조언대로 퀄컴은 투자 계획을 앞세워 두 사람의 면담 일정을 잡으려는 계획에 착수한다. 김영훈 퀄컴코리아 부사장은 2015년 6월14일 퀄컴벤처스(퀄컴의 벤처투자 자회사)에 투자 계획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퀄컴의 벤처 투자는 박 대통령과 제이컵스 회장의 면담을 유인할 수 있는 ‘미끼’였다. 제이컵스 회장은 약 보름 뒤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대관팀의 조언대로 한국의 신생 벤처기업에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개월 뒤인 2015년 8월, 퀄컴은 ‘케이-프로젝트 제안’(Idea proposal for K Project)이라는 문서를 작성한다. 이 문서에는 ‘이해당사자 지도’(Stakeholder Map for K)라는 이름으로 청와대, 기획재정부·미래창조과학부·특허청 등의 정부, 국회, 언론, 학계 등 공정위 조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들의 관계도가 그려져 있다. 또 ‘이해당사자 분석’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는 청와대·정부·국회·학계의 중요 로비 대상자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맥 등을 정리했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을 “퀄컴 문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영향력자’(key influencer)”로 지목했고, 제이컵스 회장과 면담한 적이 있는 조신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은 안종범 수석에게 퀄컴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중개인으로 꼽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잘 알려진 오른팔” “안종범 수석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적었다. 제이컵스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있는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혔지만 “최 장관이 본인의 성정상 퀄컴 일에 연루되는 걸 꺼린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이들에게 전달할 메시지와 달성해야 할 목적도 명시됐다. 안종범·조신 수석, 최경환 부총리에 대한 로비 목적은 “공정위원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퀄컴 사건 결정을 늦추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전달할 ‘메시지’, 즉 이들을 압박할 논리는 △지식재산권 보호는 새로운 성장산업(5G, 사물인터넷, 스마트자동차)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퀄컴에 과징금을 매길 경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무역관계 긴장이 생길 수 있으며 △10월에 예정된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부정적 영향이 있고 △아이티 산업의 세계적 충격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최양희 장관에게는 “세계적인 혁신기업과 함께하는 지식재산권 보호 정책이 어떻게 한국의 5G, 사물인터넷, 스마트자동차 산업을 발전시킬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왜 퀄컴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해야 하는지 인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호영 주미대사에게는 “지식재산권 보호 정책이 한-미 양국의 우호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보여주고 “한국의 규제로 미국 기업들이 유감을 나타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퀄컴은 또 교수 등 학계를 동원해 관련 세미나를 열거나 언론사 기고를 통해 공정위를 압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공정위를 감독하는 국회 정무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간사들도 접촉해야 할 중요 명단에 올렸다. 정계·관계·학계·언론계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로비를 통해 공정위의 조사를 무력화하려는 ‘큰 그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8일 미국 워싱턴 윌러드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미국 상공회의소 주최 오찬에서 오른쪽에 앉은 폴 제이컵스 퀄컴 회장(당시 한미재계회의 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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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정부 등 관계자 ‘지도’ 그려
“공정위 조사 연기-축소-합의 전략” 2016년 한-미 FTA 거론 정부 압박
“청와대가 큰 관심 갖고 있다 했다”
결국 과징금 1조원 부과받고 수포로 같은 시기 삼성은 ‘최순실 존재’ 확인
1년 동안 정유라에게 돈 78억원 사용
퀄컴은 ‘비공식 영향력 인물’ 못 찾아 퀄컴의 ‘노력’ 덕분인지 2016년 8월9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외국인투자옴부즈만이 퀄컴코리아 사무실을 방문했다. 김승수 퀄컴코리아 홍보전무는 옴부즈만이 방문하는 이유로 “힘겹게 일하고 있는 외국 기업의 상태를 체크하라는 고위층(high levels)의 지시를 받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 “옴부즈만의 임기가 ‘박 여사’와 함께 내년에 끝나는데 잡음 없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게 그의 관심사항”이라고 적었다. 다음날 옴부즈만을 면담한 이태원 퀄컴코리아 사장은 “청와대가 퀄컴 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옴부즈만의 발언을 전했다. 또 “청와대 경제수석이 그를 보냈고 돌아가서 보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달 뒤인 2016년 9월8일, 이태원 사장은 ‘PJ(폴 제이컵스) 서울 방문 보고’ 문서를 ‘특별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사내에 회람시켰다. 이 사장은 “제이컵스 회장이 지난주 한국 장관들과 국회의장, 청와대 수석을 만났고 그들 모두 성장사다리펀드를 포함한 한국 스타트업을 위한 퀄컴의 벤처 투자를 언급했다”며 “그들이 우리의 벤처 지원에 감사했고 지속적인 지원을 요구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위 사건을 중심으로 토론했지만 한국 공직자들은 벤처 투자 문제를 주요 화제로 삼았다”고 했다. 제이컵스 회장이 만난 한국의 ‘실력자’들이 퀄컴-공정위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곳저곳에서 좋은 신호를 읽지 못한 제이컵스 회장은 2016년 10월1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현대원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이컵스 회장은 “최근 한국 방문 기간에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운을 뗀 뒤 “공정위의 퀄컴 조사가 전세계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건전한 독점금지 원칙에도 위배되며 증거나 경제이론으로 뒷받침되지도 않는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어 제이컵스 회장은 공정위의 제재가 실현되면 “퀄컴은 한국에서 사업하는 방법을 재평가할 계획”이라고 압박성 발언을 덧붙였다. 퀄컴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케이-프로젝트’는 2016년 12월21일 공정위의 1조300억원 과징금 부과와 함께 막을 내렸다.
2016년 12월28일 정무세종청사에서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가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심사 보고서를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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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시정명령에 퀄컴 핵심 사업모델 흔들려 “한국은 퀄컴을 크게 도왔지만, 퀄컴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도 한국이다. 그것도 두차례나.” 한 통신업계 전직 임원의 말이다. 이 말처럼 한국은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에 ‘사업적 은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2700억원과 1조원의 과징금을 매기고, 그보다 훨씬 예민한 ‘특허권 조정 시정명령’을 내린 나라이기도 하다. 퀄컴은 이동통신 관련 특허기술과 모뎀 칩세트를 판매하는 글로벌 정보통신기업이다. 1990년대 말 작은 벤처회사 퀄컴이 디지털 통신기술의 일종인 시디엠에이(CDMA) 기술을 개발했을 때,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당시 티디엠에이(TDMA) 등 기존 통신기술이 있었는데 한국은 과감하게 시디엠에이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이를 이용해 고품질의 효율적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퀄컴은 이를 계기로 통신 시장에서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 퀄컴은 지난해 기준 매출 232억달러, 세계 7위 반도체 회사로 성장했다. 2009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퀄컴에 첫 제재의 칼을 들이댔다. 퀄컴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기업에 따라 로열티를 차별하고 조건부 리베이트를 제공했다며 2700억원의 과징금과 ‘로열티를 차별하지 말라’는 시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퀄컴은 이에 불복해 2700억원 반환 소송을 하고, 현재 대법원에 5년째 계류 중이다. 경쟁 회사들에 특허기술 제공 거부
공정위 조사 끝 1조원대 과징금에
특허권 제공 방식 시정하라고 명령
“변호사비만 수백억원 쓸 만큼 치명적” 2016년 12월 공정위는 ‘2009년 제재’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를 한다. 1조원이라는 역대 최대 과징금과 함께 퀄컴의 특허권 제공 방식에 대한 시정명령을 한 것이다. 이는 퀄컴의 핵심 사업 모델을 건드린 매우 중요한 제재였다. 공정위가 문제 삼은 건 퀄컴의 특허권 사업 방식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를 보면, 퀄컴은 무선통신에 반드시 필요한 ‘표준필수특허’(SEP)를 갖고 있는데 이를 인정받기 위해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으로 라이선싱하겠다’는 프랜드(FRAND) 확약을 수용했다. 특허권 사용을 원하는 기업들에 차별 없이 특허권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고 퀄컴의 기술을 표준특허로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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