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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31 22:36 수정 : 2019.05.31 22:43

2017년 6월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가 대구퀴어문화 축제에서 트랜스젠더 건강연구를 위한 설문을 받고 있다. 김승섭 교수 제공

[김승섭 고려대 교수 기고]
초등학교부터 대학, 병원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 친화’가 자부심이 되는 미국
소수자 혐오 일삼는 일부 한국 정치인들
시대착오 혹은 무능력한 존재 자인하는 것

2017년 6월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가 대구퀴어문화 축제에서 트랜스젠더 건강연구를 위한 설문을 받고 있다. 김승섭 교수 제공
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미국 보스턴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학교 외벽에 스프레이로 동성애를 조롱하는 글을 써놓아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혐오 표현은 성소수자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일하는 성소수자 직원들이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학교는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모방 행동을 부를 수 있어 걱정되지만 문제를 숨기기보다 함께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학부모를 포함한 학교 구성원들이 모여 다양한 소수자들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을 함께 논의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학부모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예민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교육하면 결국 동성 간 섹스에 대해서도 직접 말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요?” 제 건너편에 앉은 한 어머니가 던진 질문에 5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답했습니다. “물론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있죠. 그때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안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답을 했어요. 지금까지 아이들은 제 답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했습니다.”

지난 2월 데이나파버 암연구소 신규직원 교육에서 발표자가 지난해 연구소가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으로 선정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김승섭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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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성소수자 혐오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교가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성적지향만이 아니라 인종, 성별, 출신 국가, 경제적 상황 등에 따른 다양한 소수자들이 학교에 있는데, 이번 사건이 방치된다면 다른 소수자들이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의를 마칠 무렵, 주 정부 교육청에서 나온 강사는 “우리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오늘의 미팅은 그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며 앞으로 어떤 변화를 실천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성소수자가 ‘금기어’인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지난 2월 보스턴 지역 교육청 온라인 사이트에서 아이들의 신원등록을 할 때 남성, 여성과 함께 ‘그 밖의 다른 성’(others)을 성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죠. 성소수자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미국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현재 세계적인 암 연구기관인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와 하버드 보건대학원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10년 전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와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공동체가 소수자의 인권을 대하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이제 미국에선 자신의 조직이 성소수자 친화적이라는 사실이 큰 자랑입니다. 얼마 전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신규직원 교육을 받을 때였습니다. 지난해 연구소가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병원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피피티 화면을 보여주며 강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성적지향이나 인종을 포함한 여러가지 정보를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곤 합니다. 스스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고정관념은 편리한 만큼, 그릇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힘을 지키기 위해 유포했던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무너뜨리는 과정이었습니다. 200년 전 열등한 유색인종은 우월한 백인종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100년 전 사람들은 여성은 감정적이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인종과 성별에 대한 비과학적 편견과 차별을 옹호하는 말은 오늘날 상식을 가진 사람의 입에서는 들을 수 없는 부끄러운 유물이 됐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상식이 과거의 표준을 낡고 닳게 해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하기로 했던 중요한 이유는 동성애가 그 자체로서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또는 직업능력에 결함이 있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성별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성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성적지향은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데 장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46년이 지난 지금, 이 결정은 명백한 상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다양한 색깔로 꾸려가는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가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현재 아일랜드의 총리 리오 버라드커와 룩셈부르크의 총리 그자비에 베텔은 모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입니다. 트랜스젠더인 대만의 오드리 탕처럼 성소수자가 장관으로 일한다는 이야기는 더는 뉴스가 되지 못합니다. 능력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유엔과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는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조직의 핵심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 동성애 혐오를 외치는 이들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전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인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 역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고,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 중 91%가 성소수자 차별금지 내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는 기업을 찾는 게 빠른 상황입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1층에는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김승섭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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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지원할 수 없다

학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은 규정상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이 없는 앨라배마나 텍사스 등에서 열리는 학회에 주 정부의 연구비를 이용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주의 법률이 그렇습니다. 성소수자가 차별받을 수 있는 곳에서 중요한 학회가 많이 열리면 그 자체로 성소수자가 연구자로 살아남기 어려운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하버드 보건대학원 1층에는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거대한 깃발 세개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잔혹한 사건에서 탄압당하고 때로는 학살당했던 성소수자의 삶을 기억하기 위한 깃발입니다. 그곳에는 “진짜 깃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영혼으로부터 뜯겨 나온다”고 적혀 있습니다. 낙인과 혐오 속에서 성소수자들이 살아낸 과거의 기억들은 생생한 현재가 되어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국의 한 공무원이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한국에서 성소수자가 몇명이나 있는 건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로 차별을 겪고 있다는 증거가 있나요?” 저는 그 질문이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한국 성소수자가 살아가는 세상을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합니다. 다수인 비성소수자에게는 ‘자연스러운’ 그 공기가 누군가에게는 질식할 것 같이 불안한 폭력입니다. 국가 대표성을 지닌 한국의 수많은 설문조사 중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묻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성소수자 규모를 추산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동성 커플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트너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도 보호자로 서명할 수 없습니다. 올해 서울대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의 토드 헨리 교수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파트너와 따로 살고 있습니다. 서울대 규장각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 왔지만 학교 기숙사 쪽에서 동성 커플은 입주할 자격이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보스턴 아동병원이 직원들에게 6월8일 ‘프라이드 퍼레이드’(퀴어 퍼레이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이 담긴 게시물을 병원에 붙여놓았다. 김승섭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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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로 연명하는 정치

저는 그런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난 몇년간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면서 하나씩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유를 묻자, 30%가 넘는 응답자들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드러나 출생 때 성별이 밝혀지거나 주목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답했습니다. 까다로운 규정 탓에 19살 이전에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하지 못한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군복무를 하며 관심사병으로 분류되고 성희롱과 성폭력을 경험합니다. 다수자는 ‘자연스러움’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생존이 위협받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한 거대 정당은 선거 때마다 ‘동성애 반대’를 내겁니다. 수십년을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들이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세계적 흐름에서 낙오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진심으로 성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손쉬운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혐오는 저열한 만큼 편리하니까요. 전자라면 노예제 찬성론자나 여성 차별론자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자신이 소수자 혐오를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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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퀴어문화 축제를 축하합니다

2019년 6월1일, 서울광장에서 성소수자 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2000년 50명이 모여 시작한 행사가, 지난 20년을 거치며 수만명이 참여하는 축제로 성장했습니다. 이 행사를 두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동안 벽장 속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이 수많은 성소수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비극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광장에 나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는 것입니다.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진행할 수는 없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한국처럼 성소수자 혐오가 극심한 사회에서 일년에 단 하루 진행하는 ‘합법적인’ 축제에서도 그 표현 방식이 제한되어야 한다면 365일 전부를 스스로를 검열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니까요.

모든 소수자가 두려움 없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의 20주년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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