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삼해주 부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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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 약주 기능보유자인 권희자(왼쪽)씨가 서울시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 지하 1층에서 숙성중인 삼해주 항아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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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은 공동체의 역사와 삶이 녹아 있는 문화다. 이 때문에 각 나라 또는 지역마다 오랫동안 계승돼온 대표적인 술이 있다.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와인과 코냑, 독일의 맥주, 일본의 사케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통술은 뭘까? 막걸리, 안동소주, 진도 홍주, 한산 소곡주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술이라고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한국을 대표할 전통주를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널리 유행했던 삼해주 부활 프로젝트다.
투명한 잔에 따라준 액체의 빛깔부터 달랐다. 술인 줄 몰랐다면 늦가을에 말려뒀던 감국을 우려낸 국화차로 착각하기 쉽겠다. 너무 짙지도 옅지도 않은 노란색이 어서 마셔보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입안으로 밀어넣자, 맑고 시원한 기운이 머리속까지 끼쳐왔다. 곧이어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입안에 감돌았다.
지난 8일 창덕궁 앞에 위치한 서울시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에서 올해 빚은 삼해주를 맛봤다. 삼해주 기능보유자인 권희자(76)씨가 빚어서 걸러낸 술이다. 하지만 명인의 평은 인색했다. 권씨는 “좀 더 드라이했으면 좋겠는데 이번 것은 단맛이 약간 강하네요. 산미도 조금 더 있으면 훨씬 낫겠고요. 술을 빚는 자연환경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니 어쩔 수 없지요”라고 말했다.
권씨가 빚은 삼해주가 일반에 공개된다. 11일(토)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커뮤니티센터에 가면 권씨의 삼해약주를 ‘음미’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운 좋으면 또다른 삼해주 기능보유자인 이동복(91)씨의 아들 김택상(65)씨가 빚은 삼해소주도 맛볼 수 있다. 막걸리학교(교장 허시명)와 마포 연남동주민공동체, 마포FM 등이 주관하는 ‘삼해주 부활 프로젝트삼해주 100년 만에 마포로 돌아오다’의 일환으로 열리는 삼해주 시음회 현장이다. ‘삼해주 부활 프로젝트’는 삼해주의 본거지인 마포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삼해주 축제’다.
이규보의 삼해주 답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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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 소주 기능보유자인 김택상(오른쪽)씨가 서울 북촌 삼해소주가에서 소주 제조법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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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주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전통 명주다. 기록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간다. 고려 최고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는 삼해주에 관한 시(‘나는 또 특별히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를 가져다준 데 대해 사례하다’(予亦別作一首謝携三亥酒來)) 한 수를 남겼다.
쓸쓸한 집 적막하여 참새를 잡을 만한데(閑門寂寞雀堪羅)
어찌 군후의 방문 생각이나 했으랴(豈意君侯肯見過)
다시 한 병의 술 가져오니 정이 두터운데(更把一壺情已重)
더구나 삼해주 맛 또한 뛰어났네(況名三亥味殊嘉)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시를 지어 답례해야 할 정도로 삼해주가 귀한 선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삼해주의 이름값은 높았다. 성종 때의 문신인 서거정이 엮은 해학집 ‘태평한화골계전’에는 술을 좋아해서 중병이 든 이씨 성을 가진 장군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웃사람이 ‘술과 고기를 끊고 염불을 하라, 그러면 극락왕생할 것’이라고 충고하자, 그는 “거기에도 잘 익은 돼지머리와 맑은 삼해주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하자, “만약 (삼해주가) 없다면, 비록 극락이라도 나는 가고 싶지 않네. 자네는 더 말하지 말게”라고 했다고 서거정은 적었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인으로 꼽히는 노계 박인로가 지은 가사 ‘누항사’에도 삼해주가 나온다. 누항사는 노계가 임진왜란 이후 고향인 경북 영천에 은거할 때 쓴 것으로, 농사짓는 가난한 선비의 생활을 그렸다. “염치없지만” 논을 갈 소를 좀 빌려달라는 노계에게 이웃집 주인은 “거저로나 값을 치거나 빌려줄 만도 하지만, 어젯밤에 건넛집 저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오르게 구워내고, 갓 익은 삼해주를 취하도록 권해 왔으니, 이러한 고마움을 어찌 아니 갚겠는가”라고 답한다. 꿩 안주에 삼해주를 준 사람에게 소를 빌려주기로 했기에 당신 차례는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삼해주는 극락하고도 바꿀 수 없는 풍류의 술이며, 귀하디귀한 소를 빌릴 수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이었다.
삼해주는 전국 각지에서 유행했던 것 같다. ‘누항사’의 배경이 된 영천과 멀지 않은 안동 등지에서도 삼해주가 만들어졌다. 17세기에 나온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는 삼해주를 만드는 4가지 방법이 기술돼 있다. 책의 저자인 안동 장씨 부인의 고향은 안동이며, 시가는 영양이다. 호남에서도 마신 기록이 있다. 기대승의 ‘고봉집’에 있는 시 ‘식영정의 시에 차운하다’(次息影亭韻)에는 “밝은 해는 봄 정자에 걸리었네(白日麗春亭), 좋은 술 삼해를 기울이고(美酒傾三亥)”라는 구절이 있다. 무등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식영정에서 삼해주를 마신 풍취를 그린 시다. 한양에서 술을 미리 챙겨 갔을 수도 있지만, 전남 담양에 있는 식영정은 조선시대 최고의 가객이자 술꾼인 송강 정철이 머물면서 ‘성산별곡’ 등 작품을 썼던 곳인 만큼 삼해주를 빚는 기술이 주변 동네에 전수됐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삼해주가 크게 성행한 곳은 한양이었다. 궁핍한 시대에 아무나 만들어 먹을 수 없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일년에 딱 한차례 빚는 삼해주는 정월 첫 해(亥)일(12지간의 돼지날)에 밑술을 담근다. 이어 다음달과 그 다음달 해일에 덧술을 해서 익힌다. 제조법에 따라 다소 빨리 먹기도 했지만, 보통은 100일이 꼬박 걸렸다. 그래서 백일주로 불렸다. 또 버들가지 꽃이 나올 때쯤 마신다고 유서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마시던 탁주와 달리, 비쌀 수밖에 없던 술이었다. 사대부 가문이나 돈 있는 상인 및 중인들이 많은 서울에서 유행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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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주 부활 프로젝트를 주도한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이 김택상 삼해 소주 장인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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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집안에 비법 전한 복온공주
양반가에서 직접 빚어 마시던 가양주이기도 했지만, 한양에서는 상품으로도 많이 제조되고 판매됐다. 삼해주의 주산지는 한강 나루터가 있던 지금의 마포 일대였다. 마포대교에서 서강대교 사이의 한강은 서해 바닷물이 들어와 큰 호수(서호, 마호, 용호 등 3개의 호수를 통틀어 삼개라고도 불림)를 이룰 정도로 물결이 잔잔해 예로부터 나루가 발달했다. 세곡인 삼남지방의 쌀을 비롯해 소금과 젓갈 등 각종 생활필수품들이 이곳을 통해 한양 도성으로 들어왔다. 한마디로 돈과 상품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여기에 술 빚기에 적당한 장소까지 마포에는 갖춰져 있었다. 지금의 독막길(공덕동 로터리 부근에서 합정역에 이르는 3.6㎞의 거리) 주변에 즐비하던, 항아리 만드는 독막들이 그것이었다. 정월에 빚는 삼해주는 겨울철 일을 쉬는 독막에게는 맞춤인 일거리였다.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 3월 편에 “소주로는 독막(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대흥동 사이) 주변에서 만드는 삼해주가 가장 좋은데 수백 수천 독을 빚어낸다”(정승모 풀어씀, 도서출판 풀빛, 2009)고 적혀 있다.
이렇게 번성했던 마포의 삼해주는 일제가 양조에 허가를 받게 하는 주세법(1909년)을 만든 이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특히 1916년 주세령이 시행된 이후부터는 소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일제는 이때부터는 가양주까지 면허를 받게 하고, 면허자가 죽은 뒤에는 그 자녀들이 술을 빚지 못하도록 해서 기술 전수가 이뤄지지 못하게 했다. 더구나 1934년에는 자가소비용 주류 제조 면허제 자체가 폐지됐다. 이 때문에 1916년까지만 해도 30만곳이 넘던 술 제조장이 1932년에는 단 1곳으로 줄었다. 해방 이후 미 군정도 양곡 관리를 명분으로 양조 금지령을 내렸으며,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에는 쌀을 이용한 술 제조가 전면 금지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백종의 다양한 전통술이 사라졌으며, 삼해주도 잊혀갔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기에도 삼해주의 명맥을 이어온 두 가문이 있었다. 하나는 조선 후기 권문세가였던 안동 김씨네였으며, 다른 하나는 통천 김씨 집안이었다. 안동 김씨네는 약주이고, 통천 김씨네는 소주였다. 2차 덧술까지 술을 빚는 것은 동일하며, 술이 다 익은 뒤에 맑은 청주를 거른 상태가 약주, 약주를 소주고리에 담아 증류한 것이 삼해주 소주다.
안동 김씨 가문에 삼해주가 전해진 경로는 비교적 분명하다. 순조 임금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1818~1832)가 1830년 김병주와 혼인하면서다. 비록 결혼 뒤에도 복온공주는 궁에 대부분 머물렀지만, 시댁의 제사나 잔치 때 궁중의 나인들이 나와서 술과 음식을 마련해줬다. 눈썰미 좋은 안동 김씨네 부인들이 궁궐의 삼해주 비법을 이때 배워 며느리들에게 대를 이어 물려줬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8호(삼해주 약주)인 권희자씨는 복온공주부터 따져 5대째 며느리이다. 권씨는 “1962년에 결혼했을 때 집안의 큰 항아리를 보고 놀랐어요. 매년 음력 정월 첫 해일에 시어머니가 술을 빚어서 다 익으면 광에 있던 큰 항아리에 보관했어요. 고려대 교수로 있던 시아버지(김춘동)가 살아계실 때는 유진오, 조지훈 등 유명인사들이 우리집 사랑방에 매일같이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삼해주를 대접했어요”라고 말했다. 권씨도 두 며느리를 후계자로 삼았으며, 아들 2명에게도 전수했거나 전수 중이다. 김씨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에서 일반인들에게도 삼해주 약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교육전시장에는 권씨가 직접 만든 하얀색의 백국이 있었다. 일반적인 누룩향이 거의 없고, 맛을 보니 오히려 구수해서 자꾸 손이 갔다. 권씨는 “삼해주의 성패는 누룩에 달렸어요”라며 “좋은 누룩을 만들기 위해 한여름이면 공기 맑고 바람 좋은 곳을 찾아 전국을 다녀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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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자 삼해 약주 장인이 만든 백국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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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백국 누룩 사용
통천 김씨 집안의 맥을 이은 이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8호(삼해주 소주) 이동복씨다. 이씨 역시 통천 김씨 며느리의 맥을 이었다. 통천 김씨네도 조선시대 참판을 지냈던 분이 어느 시점에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정부 시절 밀주 단속에도 소주 내리는 기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씨와 남편이 대천에서 양조장을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양조장 한편에서 표나지 않게 집안의 비법인 소주를 내릴 수 있었다. 삼해 소주의 기능은 이씨의 아들인 김택상씨가 물려받았다. 김씨는 1980년대 후반 대기업을 그만두고 가업을 이어받아 30여년째 소주를 만들고 있다. 김씨는 2년 전부터 서울 북촌 한옥을 빌려서 공방인 ‘삼해소주가’를 운영하고 있다.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방문객들에게 직접 만든 소주를 맛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만든 소주는 맑은 물처럼 투명하다. 알코올 도수가 45도나 되는데도 매우 부드럽다. 입안에서 굴리자, 혓바닥이 알싸하면서도 가벼운 단맛과 적당한 누룩향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김씨는 “좋은 증류주는 목넘김이 좋고 후향이 좋아야 해요. 또 쓴맛이 먼저 있은 뒤에 단맛이 와야 하죠”라고 말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민속주 제조가 허가된 뒤 태릉 삼해주가 1990년대 초 판매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 ‘삼해주 부활 프로젝트’는 삼해주를 살아 있는 ‘서울의 술’, 나아가 ‘대한민국의 전통술’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8년 전부터 막걸리학교를 만들어 전통주를 보급하고 있는 허시명(54) 교장의 제안에 두 장인이 흔쾌히 동의해 이뤄졌다. 허 교장은 “술은 인류의 문명과 함께해온 문화이자 역사이죠. 영국의 위스키, 독일의 맥주, 일본의 사케처럼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품격 있는 술이 삼해주입니다”며 “이번 마포 행사를 계기로 집집마다 삼해주를 빚어서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시를 읊으면서 마시던 바른 술 문화를 살렸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막걸리학교 학생들이 허 교장과 함께 올 정월 첫 해일인 2월11일 담근 삼해주도 11일 연남동커뮤니티센터에 나온다.
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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