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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통제 구역인 강화군 교동도의 교동이발관에서 이발사 지광식씨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이발 도구들과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뒤쪽 텔레비전에선 사흘 뒤(4월27일) 있을 남북정상회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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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민통선 섬마을 이발사의 기다림
황해도 연백과 2.5㎞ 떨어진 교동도
바다 건너 피란온 살향민 이발사가
민통선 섬마을에서 79살 되도록
오지 않는 손님을 홀로 기다린다
망향대 망원경으로 훤히 보이는 고향
손님 의자에 앉아 회담 소식 들으며
“기력 있을 때까지 가위질하는 맛으로”
바다 건너 고향 밟을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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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통제 구역인 강화군 교동도의 교동이발관에서 이발사 지광식씨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이발 도구들과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뒤쪽 텔레비전에선 사흘 뒤(4월27일) 있을 남북정상회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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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 2.5㎞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섬과 육지가 있습니다. 본래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분단과 철책으로 쪼개져 망원경 안에서나 만나는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됐습니다. 4월27일 남과 북의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의 만남 사흘 전 민통선 섬마을 이발관에서 일흔아홉 살 이발사가 손님을 기다립니다. ‘회담 뉴스’를 들으며 적게는 하루 한두 명 오는 손님의 방문을 기다립니다.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올 ‘반가운 소식’을 기다립니다.
손님 없는 빈 이발관에서 텔레비전이 혼자 떠들었다.
바다 탓이 아니었다
“남북 실무자회담, 4·27 회담 일정 합의.”(4월24일 <와이티엔>(YTN) 속보)
사흘 뒤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전하는 자막이 낡은 브라운관에 떴다 사라졌다. 섬마을 이발관에서 일흔아홉 살의 이발사가 말없이 쳐다봤다.
교동이발관(강화군 교동면 대룡리)에서 뉴스는 고요에 섞여 흘렀다. 이발사 지광식(79)이 손님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이발관에서 손님 대신 뉴스가 머물다 나갔다.
섬과 육지가 끊긴 까닭은 바다 탓이 아니었다.
너비 2.5㎞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의 섬과 북의 육지는 본래 ‘이웃동네’였다. 바다 북쪽의 연백(황해도)은 한반도 대표 곡창지대(해주만과 예성강 하류 사이의 연백평야)였다. “연백쌀을 받기 전엔 서울 사람들이 밥을 안 먹었다”(지광식)며 비옥한 땅과 기름진 쌀을 자부했다. 농번기 땐 바다 남쪽 교동도 사람들이 배로 건너가 일손을 돕고 곡식과 먹을거리를 받아 왔다.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올라가던 섬 이웃들과 바다를 건너 섬으로 내려오던 육지 이웃들이 철책이 솟은 뒤부터 ‘남북’이 됐다. 그들은 서로에게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되어 서로의 망원경 안으로 들어갔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오늘 새벽 0시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대북 확성기 방송이 전면 중단됐습니다….”(4월24일 <와이티엔> ‘군, 오늘 새벽 0시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 전면 중단’)
오래된 가위와, 이빨 빠진 빗과, 손때 묻은 바리캉이 지광식 앞에서 가지런했다.
이발사와 함께 이발관을 지켜온 도구들이 이발사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손님들과 실랑이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들을 기다리며, 섬의 이발사는 65년을 이발소에서 보냈다. 벽지 위에 핀 꽃들이 빛바래 시드는 사이 이발사의 뺨에선 검버섯이 피어 만개했다.
섬, 교동도.
강화도 해안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바다에 면적 47.14㎢의 땅덩이가 있었다.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해병대의 검문을 거쳐야 교동대교(강화도와 교동도 연결)에 진입할 수 있었다. 철책이 모든 해안선을 둘러쌌고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온 섬을 주시했다. 연백에서 전쟁을 피해 바다를 건넌 12살 지광식은 ‘곧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섬사람으로 67년을 살았다. 언젠가는 고향 흙을 만질 것이란 기대를 지저분한 머리카락처럼 잘라내며 시간을 견뎠다.
“야 이발관 봐라.”
“아직도 이런 데가 있네.”
교동도 대룡시장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시간이 멈춘 이발관’을 사진기에 담았다. 페인트로 쓴 ‘교동이발관’ 간판이 좁은 시장 골목에서 낡은 시간을 전시했다. ‘이런 데’서 지광식이 문을 열고 골목을 내다봤다.
골목의 너비는 ‘그때’ 그대로였다. 지광식의 가족이 목선을 타고 섬에 도착했을 때 대룡리는 “허허벌판”이었다. 집 없는 피란민들이 남의 집 마당과 외양간을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대룡시장은 피란민들이 모여 만들었다. 산에서 나무를 찍어다 말뚝을 박은 자리에서 바다를 넘어온 사람들이 음식을 팔고 사면서 시장이 됐다. 말뚝과 말뚝 사이의 폭이 지금까지 이어져 가게와 가게 사이의 간격이 됐다. 그 자리는 그대로인데 그 자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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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교동도 지석리 망향대를 찾은 사람들이 망원경으로 바다 건너 북쪽 땅(황해도 연백군)을 바라보고 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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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내 차례겠지.”
조발 커트(머리 깎고 감고 면도까지) 1만원. 커트 9천원. 초·중고생 7천원. 세발 드라이(머리 감고 드라이) 5천원. 조발 염색 2만원. 텔레비전 옆에서 ‘요금표’가 뉴스 자막과 경쟁했다.
머리카락은 지치지도 않고 자랐다.
전쟁으로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몸속에 끊어내고 끊어내도 끝없이 싹을 틔우는 필사적인 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발사는 놀라웠다. 그 뿌리 덕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발관을 찾아왔고, 지광식은 열대여섯 때부터 이발소로 물을 져나르며 밥을 벌었다. 연백 사람 두 명이 낸 이발소에서 그는 청소하고, 머리를 감기고, 물을 길어 왔다. 씻을 물이 없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이발소에 와서 세수를 할 때마다 지광식의 속은 물처럼 출렁거렸다. 혼자 배운 가위질로 이발소를 내고 독립했을 땐 ‘배신자’라며 괴롭히는 옛 사장과 주먹다짐도 했다. 서울 을지로 국도극장 옥상에서 ‘시장 지게꾼들 앉혀 놓고 머리 깎는 시험’에 붙어 스물여섯에 이발사 면허(1965년 7월)를 땄다. 옛 사장들이 강화도 사람에게 넘긴 이발관을 쌀 200가마를 빌려 홧김에 사버렸다. 그 이발관에서 그는 지금도 손님을 기다린다.
“그래서였나.”
연백 고향집 옆에도 이발관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날렵하게 가위질하는 이발사가 멋있었다.
“이 늙은 나이까지 가위질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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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교동도 지석리 망향대에서 바라본 황해도 연백군. 남쪽의 교동도와 북쪽 연백 사이의 거리는 2.5㎞에 불과하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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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아직 오지 않았다
“구체적인 큰 틀은 이미 합의가 됐기 때문에 아주 세세한 것들, 그러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어떻게 넘어오고 어떤 포즈를 취할 것인가, 그다음에 어떻게 동선을 만들고….”(4월24일 <와이티엔> ‘남북정상회담 D-4…오늘 실무회담 개최’)
1951년 아버지가 구해온 배를 타고 교동도에 닿았던 땅이 지석리였다. 지석리 언덕 위엔 망향대가 있었다. 눈앞에 고향을 두고도 바다를 건널 수 없는 교동도 사람들과 도시에서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이 망향대에서 망원경을 당겨 연백을 봤다.
내 고향,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내 살던 곳, 놀던 곳, 다니던 학교…. 이 섬에서 몇 십 년을 살았지만 내 진짜 정은 거기밖에 없네.
내 고향, 남당리 장수동.
오토바이 타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 망원경으로 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집들. 언젠가 마음이 허전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봤더니 집이 없어. 그 자리에 창고가 들어섰어. 컨테이너 창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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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교동이발관 이발사 지광식씨가 시장 골목을 내다보고 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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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새미마을.
딱 열 집이 동그랗게 모여 살던 그 동네. 집이 안 보이니 내 마음이 휑해.
망원경(4월24일)이 바다 저편을 눈앞으로 데려왔다. 망원경 안에서 누군가는 밭일을 했고, 누군가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강가에서 숭어를 잡는 사람들도 보였다.
숭어는 분단에 갇히지 않았다. “지석리 앞바다에서 몽둥이로 때려잡을 만큼 숭어가 넘칠 때” 바다 건너 해안에서도 연백 사람들이 숭어를 잡았다.
갇힌 것은 숭어를 낚는 사람이었다. 연백과 교동도 사이엔 바다가 있었고, 바다와 교동도 사이엔 철책이 있었다. 섬 전체를 에워싼 철책 안에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섬을 “닭장”이라고 불렀다.
북을 탈출한 민간인들이 철책 너머 갯벌로 헤엄쳐 오기도 했다. 대룡시장 부근의 한 주택 옥상에서 사흘을 숨어 지내다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월선포 선창 쪽에서 덜덜 떨던 북한인을 주민이 신고한 뒤 라면을 끓여 먹였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온 사체가 교동대교 교각에 걸려 발견(
▶‘고스트 스토리’ ④ 주민번호 111111-1111111의 운명)되기도 했다.
강화도와 교동도는 2014년 7월에야 연결(길이 2.11㎞ 교동대교)됐다. 인천 월미도까지 나가려면 7시간 배를 타던 때도 있었다. 남들이 서울로 가고, 인천으로, 강화로 나갈 때, “어디로든 나갈 기반 없는” 이발사는 그저 이 작은 섬에서 고향이라도 보면서 살고 싶었다.
지광식은 쉽게 기대를 품지 않았다. 과거 두 차례 정상회담 때 부풀었던 마음도 머지않아 사그라들었다. 아내는 7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손님을 기다리듯 한번 더 기대를 걸어볼 수 있다면 아내를 다시 만나기 전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가윗날을 아무리 날카롭게 갈아도 그리움만은 잘라내지 못했다.
대룡시장 좁은 골목에 미용실만 다섯 군데 생겼다. 이발관을 찾는 손님들은 늙은 단골들밖에 없었다. 적을 땐 하루 한두 명에서 많을 땐 열 명쯤 머리를 다듬었다. 아내를 먼저 보낸 뒤 “사는 맛”이 없어졌다. 지광식은 기력이 있을 때까지 “가위질하는 맛”으로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어떤 새로운 역사가 남겨지게 될까요. 전세계의 이목이 판문점을 향하고 있습니다.”(4월24일 <와이티엔> ‘분단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판문점은 어떤 곳?’)
아직 손님은 오지 않았다.
강화/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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