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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김혜진 소설 | 한밤의 산행] 8회

등록 2013-06-13 11:07수정 2013-06-19 14:16

김혜진 소설 <8화>


사 번이 푹신한 흙 속에 박아둔 파이프를 뽑아 건넨다. 산을 오르는 내내 지팡이 용도로 말고는 사용한 적 없는 연장이다. 오 번이 파이프를 받아든다. 서늘하고 매끈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그래도, 파이픈데.

-여기서 날 새우고 싶어요? 아저씨도 빨리 집에 가고 싶잖아.

오 번이 파이프를 움켜잡는다. 파이프가 비스듬하게 공중에 걸린다. 오 번이 파이프로 가볍게 공중을 두드린다. 휙, 휙, 휙. 파이프가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른다. 파이프를 본 여자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안, 안 나올게요. 아저씨. 안 나온다고. 내일부터 안 나온다고요.

아니, 아니,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사 번이 나무 배트를 휘두르며 시범을 보인다.

-안 나오겠다는데요?

-나 참, 그걸 어떻게 믿어. 팔다리라도 하나 부러지면 모를까.

사 번이 여자의 눈앞에서 배트를 흔든다. 오 번은 파이프의 차가운 표면을 오래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움직여본다. 하나아, 두우울. 여자의 어깨에 한 번, 여자의 볼에 한 번, 파이프의 끝을 살며시 내려놓았다가 떼는 식으로. 하지만 선뜻 여자를 가격하지 못한다. 똑같은 구령만 반복될 뿐, 파이프는 매번 여자를 비껴 선 지점에서 정지한다.

-아, 진짜, 빨리 좀 하라고요. 추워 죽겠는데.

-아, 참, 난감하네요.

-거봐요. 파이프는 휘두르기 힘들다니까.

-아무래도 다른 걸 고를 걸 그랬나.

-빨리요, 빨리.

여자는 단단한 감촉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침내 오 번이 눈을 질끈 감는다. 사 번도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다. 모두가 눈을 감는다. 긴 파이프가 크고 둥근 포물선을 그린다.

한참이 지나도록 여자는 눈을 뜨지 않는다. 오 번이 파이프를 들고 두어 걸음 물러난다. 축축한 낙엽 때문에 발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뭐, 뭐에요? 아저씨?

사 번이 먼저 입을 연다. 뭐, 뭐냐고요, 아저씨? 아, 진짜, 뭐에요? 사 번은 뒷걸음질하다가 되돌아오고, 뒷걸음질하다가 되돌아오면서 뭐에요, 뭐에요, 뭐에요, 목소리를 낮춘다.

-그냥, 겁만, 주라는, 거였잖아요. 어떡해요, 그냥 겁만 주라는 거였는데.

여자는 깊이 잠든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것 봐요, 하, 하나도 안 움직이잖아요.

사 번이 여자의 볼을 가볍게 두드린다.

-어떻게 하다니? 어쨌건 난 시킨 대로 한 거 아닙니까? 파이프로 하라면서요?

오 번이 땅 속에 파이프를 찔러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한다. 여자를 살펴보던 사 번이 몸을 일으킨다. 뭔가를 각오한 듯, 한참 입을 우물거린 다음.

-아저씨, 저, 저는요, 몰라요. 난 몰라. 난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다고요. 전 미성년자예요.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오 번이 여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사 번의 얼굴을 꼼꼼히 살핀다. 얼굴이나 어깨, 팔뚝이나 허벅지 같은 곳들을 침착하게 훑는다.

-이거요? 이거 그냥 헤나에요. 헤나 알죠? 이런 거 보면 무서워한다기에, 이것 봐요, 지워진다고요.

사 번은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팔뚝을 민다. 희미하게 잉크 자국 같은 게 묻어난다. 사 번이 랜턴을 켜고 손가락을 비춘다. 보이죠, 보이죠? 오 번이 축축한 바닥에 파이프를 깊게 꽂은 채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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