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는 불가피한 것 아닌 자본·정치·언론의 합작품
경제위기 때마다 소득 빼앗기는 서민들 삶 보살펴야
바이마르공화국의 초인플레 때 독일인과 나눈 대화를 모아놓은 펄 벅의 한 작품에는 부유층에 소득을 강제이전당하고 거지나 다름없어진 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다.
“우린 속았다. 우리는 독일인 모두가 인플레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지는 경기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인플레 기간의 승자는 대기업가와 융커당원(주로 지주귀족·장교)이다. 패자는 노동계급과 중류층이다. 인플레가 끝났을 때 대기업의 공장은 현대화해 있었다. 부르주아 신문들은 그것을 독일 산업의 기적이라 불렀다.”
맥스 샤피로는 로마제국 말기와 프랑스혁명기, 바이마르공화국, 미국의 1970~80년대 등 역사상의 인플레 시대에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찾아냈다. 그는 <가난한 억만장자들>이라는 책에서 인플레는 불가항력적인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며 정략의 산물이라고 썼다. 단기간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기업가와 재산가, 이에 협력하고 이익을 나눠 먹는 정치가·관료·학자·언론인이 인플레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1997년과 2008년, 그리고 2011년의 우리나라 금융위기와 인플레에도 놀랄 만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고성장 정책을 쓰다가 자본축적의 위기에 부닥치자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한 것이다. 1997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허리띠 졸라매기’ 정책을 강요했고,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이 “물가상승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길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물가상승을 정책 실패로 비판하는 것은 지성적이지 못한 태도”라고 말했다.
고성장에 집착해 줄곧 저금리/고환율 정책과 부작용이 더 큰 부자·기업 감세 정책을 펴왔으면서도 정책 실패가 아니라 국민의 소비행태에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인플레 압력이 그토록 강해진 뒤에도 기름값과 농산물값 핑계만 대면서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물가를 희생하고 수출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환율 정책을 써왔는데 이제 고환율 자체가 우리 경제의 올가미가 되고 말았다.
<한겨레>는 고성장 정책의 문제들을 자주 지적해왔으나 그것이 국민 실생활에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는지 부각시키는 데는 미흡했다. 최근 환율 폭등에 대해서도 시장 동향과 원인 분석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서민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좀 부족했다. 물가, 주식, 부동산, 금융대출, 유학비 송금 등 서민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게 신문의 장점인데, 그 욕구를 시원하게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 점에서 <중앙일보>가 환율과 기름값 폭등, 주가 폭락 등으로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직접 취재해 ‘트리플 공포, 서민 덮치다’(24일)란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올린 것은 눈에 띄었다.
최근 금융위기의 원인 분석도 경제적 요인에 그치지 말고 샤피로의 분석처럼 정치사회적 요인으로 확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위기는 반복되고 위기 극복의 비용은 또 서민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는 줄 알았지만 허리가 끊어진 것은 서민뿐이었고, 위기의 원인 제공자였던 일부 재벌은 국민 세금으로 부실을 털어내고 우량기업을 인수하는 기회로 삼았다.
대통령이 물가폭등을 비롯한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소비 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전래의 수법이다. 가계 빚 1000조원에 짓눌려 있는 서민들은 소비를 하려야 할 돈이 없다. 문제는 소비 양극화에 있고, 소득 양극화가 그 원인이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명품 수입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인은 안 그래도 유럽의 초고가 패션상품과 양주 등 명품 시장에서 ‘봉’으로 꼽혀왔다.
이런 풍조를 부추기는 데 재벌의 딸들이 발 벗고 나섰고 언론이 가세했다. 인천공항에 루이뷔통 매장을 연 것을 특출한 경영능력으로, 수입 명품으로 온몸을 감싼 것을 패션감각으로 포장한다. 내한한 루이뷔통 최고경영자는 “모든 여성을 모실 수는 없다”며 소비에 의한 ‘신분 차별’을 당연시했다. 공항 면세점에는 외국인보다 내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명품 수입 창구가 된 지 오래다. 국산품 비중은 25%에 불과하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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