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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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비롯한 국가 지휘부 ‘영혼의 병’이 참사 통해 드러나
한겨레 등 언론은 정치인의 거짓에 너그러운 관행 깨뜨려야
배가 물에 가라앉을 수는 있다. 때로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인 터다. 그러나 ‘세월호 참극’은 불가사의한 재난이었다. 배가 침몰했다손 치더라도, 그 값진 ‘꽃봉오리들’이 왜 그리 많이도 스러져야 했는가. 온 나라가 비통에 젖어 있는 판국에, 얼빠진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들은 어찌하여 줄줄이 등장하는가. 도대체 왜, ‘온 나라의 역량을 모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해내겠다’는 대통령의 다짐은 ‘헛말’로 끝났는가.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은 다각도로 참사의 원인을 찾아 나섰다. 사후 대응 과정의 난맥상도 낱낱이 짚어냈다. 책무를 포기한 선장과 선원들의 파렴치, ‘안전 운항’은 뒷전에 둔 해운사의 욕심, 감독 기관의 허술한 관리 등에 독자들은 함께 분노했다. 곳곳에 똬리를 튼 ‘무책임의 문화’가 사건을 불러일으키고, ‘어쩌면 작은 사고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을 대형 참사로 키운 데’ 대해 독자들은 너나없이 땅을 쳤다.
<한겨레>는 ‘묻는다, 이게 나라인가’(21일치 사설)라고 통탄했다. ‘세월호 참극’에 대한 정부의 어설픈 대처를 질타한 사설의 제목은 민심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들끓는 민심에 박근혜 대통령도 화답(?)했다. 대통령은 이날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강경한 어조로 세월호 선장의 ‘탈출’ 행위에 대해 ‘살인과도 같은 행위’라고 비난했다. 대통령은 관련 책임자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임감’은 건강한 사회를 떠받치는 핵심 덕목이다. 문제는 ‘책임의 소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에 있다.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은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분노하는 민심이 청와대와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음을 진정 몰랐단 말인가.
최고지도자는 ‘책임’ 앞에서 겸허할 필요가 있다. 권한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더구나 최고 권력자에게는 ‘법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책임감이 요구된다. 그가 지휘하는 조직이나 집단의 에너지를 한데 모아 이를 동력화하는 권능과 책무가 부여된 터다.
프로스포츠 감독들도 대부분 ‘책임 의식’에서 의연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패전의 멍에를 선수들에게 미루지 않는다. ‘비겁’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고 그들은 믿는다. 내일의 승부를 위해서도 어느 길이 순리인지를 그들은 터득하고 있다. 마치 절대왕조의 제왕들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 한없이 겸허했던 것처럼. 옛 군왕들은 나라를 덮친 ‘천재지변’조차 ‘부덕의 소치’로 여기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비탄에 젖은 국민 마음에 한 줄기 위로는 그런 태도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대통령은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도 불러일으켰다. 언론 홍보를 염두에 둔 행보는 눈에 거슬리는 법. 실종자 가족과의 ‘전화 통화’는 한가한 ‘연출’이었다. 해양경찰에게 ‘구조 작전’을 지시한 것도 적절치 않았다. <한겨레>가 지적한 ‘깨알 지시’들도 대통령의 몫이 아니었다.
‘세월호 참극’에서, 우리는 이른바 ‘매뉴얼’과 제도, 시스템의 허점을 확인했다. 그 허점에서 비극이 잉태되고, 그 허점이 비극을 크게 키운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참극의 진정한 교훈은 단순한 제도나 ‘매뉴얼’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전례 없는 참사-사고의 원시성과 재난 대처방식의 미개성은 세계적으로도 최악의 수준이었다-를 통해 우리는 사회 곳곳의 ‘병든 영혼’을 또한 확인했다. 업계의 부조리와 안일, 공직자의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정치인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났다. 어쩌면 세월호 침몰보다 무서운 재난, ‘국가 영혼’의 침몰사태를 우리는 목도한 셈이다.
매뉴얼이 복잡한 현대사회의 화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운용할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무슨 쓸모이겠는가. 특히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 지휘부가 앓고 있는 영혼의 병은 깊다. 그 병은 언론이 키워왔다는 점에서 <한겨레>도 옷깃을 여미고 그 해법에 대해 고뇌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 지휘부, 특히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의 ‘몰염치 문화’는 언론이 부추기고 있다. 정치인의 거짓에 대한 너그러운 관행은 당장 깨뜨려야 한다. 뻔뻔한 거짓말, 의례적인 위선의 말을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하는 것은 언론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행위다. ‘언론은 사실을 전할 뿐,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금언은 폐기할 때가 됐다. 디지털 시대는 온갖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파하고 있다. 정보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언론 책무의 중요성은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그 진정성과 실현성 등을 고려한 비판적 보도가 필요하다. 정치권의 그릇된 문화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병든 국가 영혼’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재난에 잠시 숨죽이고 있는 정치판이 곧 술렁이기 시작할 것이다. ‘세월호 비극’이 언제였느냐는 듯, ‘미개한 나라’의 야만적인 춤판이 벌어질 것이다. 여야는 때로는 사탕발림으로, 때로는 야심찬 구호를 앞세워 표 사냥에 나설 것이다. 한 재벌가 아들의 탄식은 방향이 빗나갔지만, 그 직관은 높이 살 만하다. 정녕 이 땅이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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