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6 16:12
수정 : 2019.11.14 17:35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곧바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이후, 선거가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정당들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책을 내세우고, 공약을 제시해야 했다. 유권자들의 삶과 밀착된 정책에 대해서 경쟁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임기응변적인 공약이건,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위한 원대한 공약이건 관계없이 모든 정당이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12년 대선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근혜 후보는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꿔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불리해진 선거 상황을 뒤집기 위해 새로운 공약을 제시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내세운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갑자기 대선 공약에서 전면에 앞세운 것이다. 투명한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주장하고,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내세워 0살부터 5살까지 무상보육, 65살 이상 노인 월 20만원 기초연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시 야당에서는 박 후보의 공약이 문재인 후보 공약의 짝퉁이라고 비판했고, 여권 내 일부 극우세력은 이런 구호가 ‘반북’과 ‘법치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보수 여당의 용어를 대체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어쨌건 이러한 선거공약 덕에 박 후보는 51.6%의 득표율로 근소하게 문재인 후보를 물리치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곧바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 의제에서 사라졌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권력을 잡기 위한 선거전략으로 잠시 언급됐을 뿐, 선거 직후에 바로 용도 폐기된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중에서 ‘복지’가 정치적 구호에서 정책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2018년 한국의 복지지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11.1%로 전해에 비해서 0.5%포인트 높아져 역대 최대 폭으로 증가했다. 아직도 한국의 복지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복지지출의 40%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이번 정부 들어 복지지출이 크게 증가했다. 선택진료제 폐지, 2~3인 병실 건강보험 적용, 치매 국가책임제와 치과치료 보험적용 등 의료복지가 크게 개선됐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2년 평가에서도 복지 분야는 정부 정책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복지정책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복지제도가 발전하고 있지만, 복지제도만으로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복지정책에 투입하는 예산의 양적 증가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복지국가는 요원하다.
<한겨레>의 창간기획 ‘대한민국 요양보고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사라진 곳에서 복지예산의 증가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노인들의 인권이 사라진 요양원의 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2008년 도입된 장기요양보험제도는 노인 돌봄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인 제도였다. 그러나 현재 많은 노인요양시설은, 돌봄의 대상이 존중받지 못하고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
노인요양원 기사를 접하면서 아주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1995년 가을 덴마크 올보르 대학에 초청을 받아서 한달간 머물던 중 대학 근처 맥줏집에서 만난 젊은 치과의사와의 대화였다. 월급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덴마크에서 치과의사가 세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세금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젊은 의사는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은 주위 사람들이 어렵게 살면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내 주변 사람들이 불행하면 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세금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세금을 더 낼 용의도 있다고 했다. 짧은 술자리 대화였지만, 덴마크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토대가 단지 제도와 돈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인권 존중이 가정, 회사, 작업장, 학교, 요양원, 병원, 종교기관, 군대 등 사회 곳곳에서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복지국가는 요원하다. 복지국가는 돈과 제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식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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