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오랜만에 만난 최아무개 법인장은 밝아 보였다. 하노이 인근에 있는 공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면서 건네는 농담과 웃음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였다. 지난여름 한복판에 베트남으로 이전한 개성공단에 있던 기업들을 둘러보고 왔다.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법무팀장으로 근무하던 2004년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에서 자주 마주치던 이였다. 일과 후에 운동도 같이 하고 소주도 한잔하던 사이였다. 지난번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만난 그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베트남 공장 자랑에 열심이었다. 건물 벽을 구멍이 촘촘히 뚫린 벽돌로 쌓고 건물 옆에 화초를 심어서 시원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며 자신이 해온 일을 뿌듯해했다.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고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긴 20여개의 기업 중 가까운 지역에 있는 법인장들은 가끔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정보도 교환한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나서도 곧 다시 열리겠거니 하고 막연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3년 동안 손실이 엄청 컸다. 베트남에서는 토지사용권을 매입해 건물을 지으면 등기를 해주고 핑크북이라는 권리증을 준다. 이 핑크북은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은행이 가져간다. 우리나라 옛날 집문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 대출이나 저당권 제도는 우리나라랑 비슷해서 불편이 별로 없다. 다만 외국인에게 인허가가 약간 까다로운 점은 있다. 베트남은 최저임금이 지역에 따라 1급부터 4급까지 다르다. 평균 임금은 1급에 해당하는 호찌민은 연장근무를 포함하면 월 500달러 정도이고 3급지는 월 250달러 정도다. 개성공단이 폐쇄될 무렵 임금보다는 약간 높다. 개성공단이 재개될 경우 임금상승을 살짝 걱정한다. 회사 앞에 펼침막이나 공고문으로 근로자 모집을 홍보하면 근로자들이 찾아온다. 근로자들이 친구도 데려오고 가족도 데려온다. 현지 세무사의 도움을 받아 세무 문제를 처리한다. 화재보험은 현지에 진출한 한국 보험사에 가입했는데 베트남 현지 보험사에 들어도 별문제가 없다. 며칠 전 돌풍이 불어와서 공장 건물 유리창 등이 파손되었는데 보험에서 처리해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베트남 제조업의 임금경쟁력은 10년 정도이면 끝날 것이고 그 후에는 아프리카 케냐 같은 곳으로 가야 하고 결국 제조업은 자동화로 갈 것 같다는 전문가의 식견도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할 만하다고 하면서도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면 개성공단으로 가고 싶다고 소망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와 있는 개성공단 기업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란다. 다만 개성공단이 또 문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개성공단에 다시 가더라도 예비적으로 베트남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바이어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성공단의 장점은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것이다. 제조공정을 설명할 때 통역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왼손으로 살살 돌리다가 오른손으로 팍 눌러야 한다”는 말을 현지어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웃으며 말한다. 회의를 할 때 개성공단에서 우리말의 미묘한 어감을 이용해 말하면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데 베트남에서는 힘들다. 개성공단에서는 매일 서울을 트럭으로 오가면서 원재료와 완제품을 나를 수 있는데 베트남은 3일에 한번 그것도 배로 먼 거리를 통해 온다.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은 개성공단 기업들만 먹고사는 곳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후 개성공단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던 업체 중 상당수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일자리는 없어졌다. 개성공단은 국내에서 원부자재를 바로 공급받을 수 있으나, 베트남에서 일해 보니 너무 어렵다고 한다. 원부자재 사업은 짧은 시간에 형성될 수 없으며 베트남이 우리나라만큼 발달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 재개가 힘들더라도 기계에 기름칠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줘야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개성공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개성공단에 와서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다가 식사하고 돌아갈 때쯤 되면 개성공단을 넓혀야 된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 법인장의 바람대로 개성공단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북한의 근로자들과 즐겁게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희망한다. 하노이에서 서울에 오는 날. 전날의 태풍과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은 멀리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칼럼 |
[세상읽기] 하노이에서 만난 개성공단 / 김광길 |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오랜만에 만난 최아무개 법인장은 밝아 보였다. 하노이 인근에 있는 공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면서 건네는 농담과 웃음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였다. 지난여름 한복판에 베트남으로 이전한 개성공단에 있던 기업들을 둘러보고 왔다.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법무팀장으로 근무하던 2004년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에서 자주 마주치던 이였다. 일과 후에 운동도 같이 하고 소주도 한잔하던 사이였다. 지난번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만난 그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베트남 공장 자랑에 열심이었다. 건물 벽을 구멍이 촘촘히 뚫린 벽돌로 쌓고 건물 옆에 화초를 심어서 시원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며 자신이 해온 일을 뿌듯해했다.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고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긴 20여개의 기업 중 가까운 지역에 있는 법인장들은 가끔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정보도 교환한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나서도 곧 다시 열리겠거니 하고 막연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3년 동안 손실이 엄청 컸다. 베트남에서는 토지사용권을 매입해 건물을 지으면 등기를 해주고 핑크북이라는 권리증을 준다. 이 핑크북은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은행이 가져간다. 우리나라 옛날 집문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 대출이나 저당권 제도는 우리나라랑 비슷해서 불편이 별로 없다. 다만 외국인에게 인허가가 약간 까다로운 점은 있다. 베트남은 최저임금이 지역에 따라 1급부터 4급까지 다르다. 평균 임금은 1급에 해당하는 호찌민은 연장근무를 포함하면 월 500달러 정도이고 3급지는 월 250달러 정도다. 개성공단이 폐쇄될 무렵 임금보다는 약간 높다. 개성공단이 재개될 경우 임금상승을 살짝 걱정한다. 회사 앞에 펼침막이나 공고문으로 근로자 모집을 홍보하면 근로자들이 찾아온다. 근로자들이 친구도 데려오고 가족도 데려온다. 현지 세무사의 도움을 받아 세무 문제를 처리한다. 화재보험은 현지에 진출한 한국 보험사에 가입했는데 베트남 현지 보험사에 들어도 별문제가 없다. 며칠 전 돌풍이 불어와서 공장 건물 유리창 등이 파손되었는데 보험에서 처리해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베트남 제조업의 임금경쟁력은 10년 정도이면 끝날 것이고 그 후에는 아프리카 케냐 같은 곳으로 가야 하고 결국 제조업은 자동화로 갈 것 같다는 전문가의 식견도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할 만하다고 하면서도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면 개성공단으로 가고 싶다고 소망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와 있는 개성공단 기업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란다. 다만 개성공단이 또 문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개성공단에 다시 가더라도 예비적으로 베트남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바이어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성공단의 장점은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것이다. 제조공정을 설명할 때 통역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왼손으로 살살 돌리다가 오른손으로 팍 눌러야 한다”는 말을 현지어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웃으며 말한다. 회의를 할 때 개성공단에서 우리말의 미묘한 어감을 이용해 말하면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데 베트남에서는 힘들다. 개성공단에서는 매일 서울을 트럭으로 오가면서 원재료와 완제품을 나를 수 있는데 베트남은 3일에 한번 그것도 배로 먼 거리를 통해 온다. 최 법인장은 개성공단은 개성공단 기업들만 먹고사는 곳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후 개성공단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던 업체 중 상당수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일자리는 없어졌다. 개성공단은 국내에서 원부자재를 바로 공급받을 수 있으나, 베트남에서 일해 보니 너무 어렵다고 한다. 원부자재 사업은 짧은 시간에 형성될 수 없으며 베트남이 우리나라만큼 발달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 재개가 힘들더라도 기계에 기름칠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줘야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개성공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개성공단에 와서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다가 식사하고 돌아갈 때쯤 되면 개성공단을 넓혀야 된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 법인장의 바람대로 개성공단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북한의 근로자들과 즐겁게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희망한다. 하노이에서 서울에 오는 날. 전날의 태풍과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은 멀리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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