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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0 18:20 수정 : 2019.12.31 02:39

김진 ㅣ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여성노동운동에 오래 몸담았던 한 선배는, 상사에 의한 성폭력을 세상에 알린 ‘미투 생존자’에게 여성노동운동 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길 가다 당했으면 경찰로 끌고 갔을 문제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견디고 당했던 일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잘리기 전에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은 대개 퇴사 이후에야 어렵게 꺼내놓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회사와 법원은 “해고에 앙심을 품고”라고 한다며 개탄했다.

내 상담실이 생각났다. 그 많은 ‘해고에 앙심을 품은 사람들’의 억울함.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 괴롭힘과 성희롱, 차별과 부당 대우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이제 와 해고라니.

글솜씨가 부족한 탓인지 내가 쓴 준비서면 속에서 그 억울함은 풀이 죽었고, 판사들은 억울함을 “증명하라”고 했으며, 끊임없이 “왜 이제 와서 이러냐”고 물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이 있었다면(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즉시 이의제기를 했어야지, 서류로 만들어 놓았어야지, 잘못했다고 시말서를 써놓고 지금은 왜 억울하다고 하는지, 그런 조건이 부당하다면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와 내 의뢰인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고, 결과는 “원고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음”을 탓하는 판결로 돌아왔다. 그런 판결문을 여러장 받고 나니, 상담실에서 내 말투도 싸가지가 없어진다. “잘못이 없다면, 회사가 왜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하세요? 3년 전에요? 아니, 그럼 그때 내용증명이라도 보내 놓으셔야 했던 것 아니에요? 다른 여성 직원들한테는 안 그랬다는데….”

회사 쪽 변호사가 이렇게 주장할 것 같아요, 판사는 이런 점을 궁금해할 거예요, 이렇게 덧붙이지만 상담테이블 너머 눈빛은 이미 억울함을 넘어 서러움으로 접어들었다. 그럴 땐 재판 결과를 예상하며 유리한 요소를 뽑아내야 하는 상담이 아니라 마음을 위로하는 말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짐짓 다시 물어야 한다. 그때 누군가에게 토로한 적이 있는지, 회사 내 누군가에게 상의하고 문제제기한 적이 있는지. “누구한테요?” 사정을 모르지 않지만 답답한 노릇이다. 내 의뢰인들이 더 억울한 노릇인 까닭은 그 억울함이 일기장 말고는 어디에도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회사는 시말서를 받고, 조사보고서를 만들고, 사실확인서를 받아두며, 재판에 필요하다면 오늘 당장 돌아가서 합법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이 얼마나 권리의식이 투철한데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있겠느냐고? 하지만 우리가 물건을 물러달라고 따질 수 있는 것, 동사무소 공무원에게 내 권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다시 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사람들에게 고용돼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의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일찍 상의되고 토로될 수 있었다면, 대신 싸워줄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노동조합을 생각한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일이 너무 많아 그렇다. 그렇게 많은 체불임금에도 몇달이 그냥 흘러갈 일도, 성희롱과 차별을 참아가며 몇년을 버틸 일도. 임금을 올리거나 파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노조가 더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올라간 노조 조직률(2018년 기준 11.8%) 소식은 많이 반갑다. 하지만 노조 수는 오히려 줄고, 300명 이상 사업장의 조직률이 높은 것(50.6%)이고 30명 미만 사업장은 겨우 0.1%이니, 갈 길이 멀다. 도저히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나 지역노조가 많이 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해고에 앙심을 품고’, 다른 말로 하면 ‘해고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억울함들이, 해고되어 앙심을 품기 전에 조합원에 대한 부당행위에 항의하는 소식지로, 차별적 처우를 협의하자는 공문으로, 그렇게 목소리로 외쳐지고 글로 쓰이고 증거로 남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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