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8.12 18:35
수정 : 2014.08.1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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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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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노동문제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 내가 하는 중요한 일들 중 하나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남달리 관심이 있는 학생들도 아니고, 보수 여당을 지지할 수도 있는 보통의 대학생들에게 노동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점들에 대해 설명을 한 뒤, 정규직화하는 것이 옳은 해법이라고 제시하면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가족들 중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 학생들은 대체로 그 주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부모님이 기업 경영자인 학생들은 반발한다. 실제로 어떤 학생은 “우리 아버지는 중소기업 사장인데요, 그 회사에 있는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화하면 인건비 때문에 회사가 망할 텐데,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라고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은 수업을 한 번 더 해야 할 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노동법을 처음 공부했던 1970년대 말, 대부분의 비정규직은 불법이었다. 한 기업 안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따로 구분해 차별하면 당시 근로기준법 제5조 ‘균등처우’ 조항에 위배됐고, 기업체에 노동자를 소개해줬다는 명목으로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면 제8조 ‘중간착취의 배제’ 조항에 저촉됐고, 회사가 종전에 없던 비정규직 규정을 새로 만들면 제95조 ‘규칙의 작성·변경의 절차’를 위반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비정규직 문제는 지금처럼 심각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무렵의 노동법 해설서들 중에는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용어가 있을 뿐,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것들도 많다.
김영삼 정부 들어 법원의 판결에 기업 입장이 점차 반영되기 시작하더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고, 결국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우리가 지금 ‘비정규직법’이라고 부르는 제도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기업이 새로운 비정규직 관련 규정을 만들어 노동자를 고용하면, 법원은 새롭게 만들어진 규정 자체가 위법이어서 무효라고 판결했다. 그토록 단순명료한 해석이 어떻게 바뀔 수 있었을까? 이를테면 “위법하게 규정을 바꾼 경우라도 규정이 바뀐 뒤에 취업한 노동자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를 판사들은 “기득이익의 침해라는 효력배제 사유가 없으므로”라고 유식하게 설명했다. 법원의 판결이 점차 기업 입장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바뀌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면서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했다. 이제 기업들은 마음대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신규 취업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세월호 선원들 중에 비정규직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세월호 승무원 29명 중 15명이 비정규직이었다. 핵심 부서인 갑판부와 기관부 선원 17명 중에서는 70%가 넘는 12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위기 발생 시 인명 구조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 선장도 1년짜리 계약직이었고, 선장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조타수 3명도 모두 6개월 내지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문제점이 발견되면 고쳐서 계속 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6개월만 때운 뒤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평소 이름도 서로 모르고 지냈다고 하니, 위기 상황에서 이름을 불러 업무를 지시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어느 누가 세월호의 선원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규직을 채용해야 하는 자리에 비정규직을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는 제도는 기업이 단기적으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 외에 사회에 미치는 유익한 영향이 거의 없다. 처음 대학생의 질문으로 돌아가 냉정하게 답한다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기업은, 도산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 다만 실직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참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박래군 “세월호 특별법 안에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대안 담겨” [한겨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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