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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7 18:52 수정 : 2014.10.07 18:52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 황유미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의 시점은 딸 황유미씨에서 아버지 황상기씨한테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이 영화는 직업병으로 숨진 ‘딸’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딸을 그렇게 잃은 ‘아버지’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유명한 배우 박철민씨가 황상기씨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실제 황상기 아버님도 집회나 회의에서 박철민씨 못지않게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다. 며칠 전 방송 인터뷰에서 만화가 주호민씨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어떻게 보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황상기 아버님은 “눈으로 봤습니다”라는 답으로 웃음을 줬다.

황상기씨가 처음 이종란 노무사를 찾아왔을 무렵에는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도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는데,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황상기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회사에 대한 증오심과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어요. 그렇게 되니까 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는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내가 죽을 거 같고, 내가 못 살 거 같고, 내가 삼성에 질 거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삼성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계속 놀린다는 마음을 갖자’ 그렇게 생각을 바꿨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을 만나면 웃을 수 있더라구요.”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었다면 딸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받도록 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8월21일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이숙영씨에 대해 직업병을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기일 내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아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우리나라 산업재해 역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 법률적 판단이 종결된 것이다. 지난주 황상기씨를 만나 “언론사에서 연락 많이 받으셨죠?”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별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토록 중요한 판결에 대해 왜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에서 직업병을 인정받기란 좀처럼 어렵다.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으려면, 유해 요인에 노출된 사업장에서 일해왔다는 ‘직업력’을 입증해야 하고, 각종 증상들이 직업병의 교과서적 증세에 해당한다는 것을 ‘임상적’으로 입증해야 하고, 여러 검사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될 만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병리적’으로 입증해야 하고, 그동안 일해온 작업장의 유해 요인들이 직업병을 일으킬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역학적’으로 입증해야 하고, 더욱이 이것들을 모두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현대의학으로도 규명되지 않은 직업병이 많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법원이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해서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며 패소 판결을 했다.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가 직업병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귀중한 계기가 돼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우선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해 ‘개인적 질병’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드물게 “직업병이 아니라는 것을 회사가 입증하지 못하였으므로 산업재해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선진적 판결이 나오기도 했지만 상급심에서 파기됐다.

황상기씨는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의 뒷좌석에서 딸의 죽음을 맞았다. 딸 유미의 눈을 감겨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죽음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고, 지금은 자기 자식뿐 아니라 다른 모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딸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죽었지만 남은 아이들만이라도 안전한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싸우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들 곁에 우리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또 하나의 약속’이 필요한 때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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