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23 18:24
수정 : 2019.04.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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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위원들이 3일 오후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태안/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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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의 평생학습관이나 공립 도서관 등에서도 요즘은 인문학 강의를 많이 진행한다. 대부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강의여서 수강생들의 출석률이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 편이다. “돈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도 있듯이 적은 비용이라도 받으면 참석자들의 관심이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제안해보지만 공공기관에서 단 몇푼의 돈이라도 받으면 그 뒤에 따르는 행정 업무가 많아져서 직원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은퇴한 퇴직자가 유독 많이 참석하는 프로그램들도 있다. 인문학 취향을 지닌 어르신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노인정’이다.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보수적 성향의 참석자들을 고려해 강의 내용의 수위를 조절해달라”고 담당 직원이 강사에게 미리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맡는 강의 주제는 주로 ‘노동인권’이나 ‘노동교육’ 등 노동문제에 관한 것들인데 한번은 중간 휴식 시간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다가오더니 자신이 직업군인 출신이라고 밝히면서 “왜 노동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안보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오늘은 강의 주제가 노동인권이어서 당연히 노동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안보에 관한 얘기는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위 훈련에서 다른 강사들이 많이 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설명했는데도 복도에 나가 다른 참석자들에게 “강사가 노동에 관한 얘기만 하고 안보에 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잖아”라고 계속 언성을 높였다. 나이 지긋한 다른 참석자가 점잖게 한마디 보탰다. “듣기 싫은 얘기를 듣는 게 공부야!” 다행히 그 말에 수긍하며 잠잠해졌다.
강의 내용 중에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더 보수화돼 있고 자본주의 모순이 더 심화된 사회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그러한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유럽의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에 관한 얘기를 하면 우리와 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친숙하다 못해 ‘숭미주의’라는 말까지 듣는 한국 보수세력에게 미국 사회에 관한 얘기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고 김용균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유럽에서는 회사가 법을 지키지 않아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기업에 대해 살인죄에 준하는 형사처벌을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영국의 ‘이턴 앤드 코츠월드 홀딩스’ 사건에서는 기업 연 매출액의 250%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했고 ‘모바일 스위퍼스’ 사건에서는 회사 총재산의 10배 넘는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회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기업이 시장질서를 교란한 것으로 보아 수백억원의 민사 배상금을 물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다고 설명하면 귀담아듣는 사람이 많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위키백과사전 등에 보면 ‘Chaebol’이라는 항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 발음하면 ‘재벌’이다. 그 항목에 이어지는 설명문에는 “한국(South Korea)에 존재하는…”이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다른 나라에는 없다는 뜻이다. 일본의 재벌은 2차 세계대전 뒤 과거청산 작업을 할 때 전범으로 해체당한 뒤 아직까지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우리나라의 ‘재벌’은 수십개의 대기업을 한 가족이 족벌적으로 소유하거나 경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에 있는 ‘대기업 집단’과 구별된다. 이러한 기업 경영 방식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시각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운 행태로 간주된다. 오죽하면 재벌 회장이 주주총회에서 사내 이사 선임에 실패하자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고, 그 회장이 숨지자 주가가 상한가까지 폭등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인사노무관리를 하거나 노동조합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기업들은 대부분 마땅히 부담하는 노동비용을 회피하기 위해 꼼수를 피우는 것은 정당한 경쟁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본다. 주주자본주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한국 재벌 대기업의 ‘노조 포비아’ 현상은 용납되기 어려운 전근대적 인사노무관리 행태이다. 박창진 전 사무장이 지부장을 맡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연대노조가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이 사내 이사로 선임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적극 나섰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귀기울여야 할 노동 이야기는 여전히 많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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