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국 사회에 형성된 노동문제에 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고용 보장’이나 ‘임금 인상’ 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이 노동자들에게만 유익할 뿐 기업이나 사회에는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다. 이런 조처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업의 노동비용을 증가시킨다는 것이고 기업이 인건비를 절약하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이라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이 한국 정부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한국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나라 기업들이 지키는 기준을 한국 기업들이 지키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이 적정한 노동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경영 방식은 자유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꼼수 경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을 비준하라는 요구는 노동 친화적이고 진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저한 시장 경제 원리를 준수하자는 차원에 불과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플랫폼 노동자들을 쉽게 개별 사업자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AB5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같은 차원이다. 우리 사회에도 자신을 ‘스마트폰에 고용됐다’고 표현하는 배달노동자 등 특수고용형태 노동자가 급증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노동법상의 각종 보호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돼 있는 상황이다. ‘자본가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이유는 기업이 마땅한 노동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고 결국 기업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이 단기적으로 인건비를 절약하는 경영 방식이 사회에 미치는 유익한 영향은 사실 거의 없다. 2016년 5월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크린도어와 열차 사이에 끼여 숨진 ‘구의역 김군 사건’을 계기로 서울지하철은 역사 수리 담당 노동자 418명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거나 신규 채용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노동자들에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고 답한다. 하청업체 비정규직일 때는 해고가 두려워 위험한 작업 지시를 받아도 “위험하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똑같은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가 3건이나 발생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처가 오직 노동자들에게만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2015년 2만196건이었던 스크린도어 고장 건수가 2018년에는 3495건으로 크게 줄었다. 당연한 결과다. 노동조건이 열악해 더 좋은 직업을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무는 직장에서는 이런 효과가 발생하지 않지만, 직접고용 정규직으로 전환돼 ‘평생직장’이 되면 행복한 노동자로 살기 위해 스스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노동자들이 제안한 몇가지 내용을 회사가 받아들이자 이런 개선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수출이나 투자보다 소비의 부가가치유발계수와 취업유발계수가 높아진 단계에 와 있다. 기업의 수출이 줄어드는 것보다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드는 것을 훨씬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시민들의 정서는 그와 정반대다. 수출이 줄어들면 나라가 망할 듯 온통 걱정을 하면서도 노동자 임금이 줄어드는 것은 경제에 유익하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깨어 있는 시민’들조차 “촛불집회에 노동조합 깃발이 안 보이니 상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민주노총 등 조직 노동운동이 제대로 했으면 그런 반응이 나오겠느냐고 탓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시각은 노동운동의 전략 전술이 저열해서라기보다 노동문제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학 입시 과정의 ‘불공정’에 분노하며 조국 장관에 반대하는 촛불을 든 대학생들이 비정규직이 겪는 ‘불평등’에 분노하며 청소 노동자 사망을 추모하는 촛불은 들지 않는다고 쓴소리하는 글을 썼다. 그랬더니 어떤 이가 “하 선생님 같은 분은 그렇게 비난하며 갈라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청년들이 불평등에도 분노할 수 있도록 품어 안으셔야 한다”고 지적해서, 이에 동의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것이 요즘 쓴소리를 아끼는 이유다.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외치는 시민들이 “민주노총 수호”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불공정’에 분노하는 청년들이 ‘불평등’에도 분노할 수 있어야 사회가 바뀐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각자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칼럼 |
[하종강 칼럼] ‘검찰 개혁’과 ‘비정규직 철폐’가 만나려면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국 사회에 형성된 노동문제에 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고용 보장’이나 ‘임금 인상’ 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이 노동자들에게만 유익할 뿐 기업이나 사회에는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다. 이런 조처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업의 노동비용을 증가시킨다는 것이고 기업이 인건비를 절약하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이라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이 한국 정부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한국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나라 기업들이 지키는 기준을 한국 기업들이 지키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이 적정한 노동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경영 방식은 자유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꼼수 경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을 비준하라는 요구는 노동 친화적이고 진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저한 시장 경제 원리를 준수하자는 차원에 불과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플랫폼 노동자들을 쉽게 개별 사업자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AB5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같은 차원이다. 우리 사회에도 자신을 ‘스마트폰에 고용됐다’고 표현하는 배달노동자 등 특수고용형태 노동자가 급증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노동법상의 각종 보호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돼 있는 상황이다. ‘자본가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이유는 기업이 마땅한 노동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고 결국 기업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이 단기적으로 인건비를 절약하는 경영 방식이 사회에 미치는 유익한 영향은 사실 거의 없다. 2016년 5월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크린도어와 열차 사이에 끼여 숨진 ‘구의역 김군 사건’을 계기로 서울지하철은 역사 수리 담당 노동자 418명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거나 신규 채용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노동자들에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고 답한다. 하청업체 비정규직일 때는 해고가 두려워 위험한 작업 지시를 받아도 “위험하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똑같은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가 3건이나 발생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처가 오직 노동자들에게만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2015년 2만196건이었던 스크린도어 고장 건수가 2018년에는 3495건으로 크게 줄었다. 당연한 결과다. 노동조건이 열악해 더 좋은 직업을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무는 직장에서는 이런 효과가 발생하지 않지만, 직접고용 정규직으로 전환돼 ‘평생직장’이 되면 행복한 노동자로 살기 위해 스스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노동자들이 제안한 몇가지 내용을 회사가 받아들이자 이런 개선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수출이나 투자보다 소비의 부가가치유발계수와 취업유발계수가 높아진 단계에 와 있다. 기업의 수출이 줄어드는 것보다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드는 것을 훨씬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시민들의 정서는 그와 정반대다. 수출이 줄어들면 나라가 망할 듯 온통 걱정을 하면서도 노동자 임금이 줄어드는 것은 경제에 유익하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깨어 있는 시민’들조차 “촛불집회에 노동조합 깃발이 안 보이니 상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민주노총 등 조직 노동운동이 제대로 했으면 그런 반응이 나오겠느냐고 탓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시각은 노동운동의 전략 전술이 저열해서라기보다 노동문제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학 입시 과정의 ‘불공정’에 분노하며 조국 장관에 반대하는 촛불을 든 대학생들이 비정규직이 겪는 ‘불평등’에 분노하며 청소 노동자 사망을 추모하는 촛불은 들지 않는다고 쓴소리하는 글을 썼다. 그랬더니 어떤 이가 “하 선생님 같은 분은 그렇게 비난하며 갈라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청년들이 불평등에도 분노할 수 있도록 품어 안으셔야 한다”고 지적해서, 이에 동의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것이 요즘 쓴소리를 아끼는 이유다.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외치는 시민들이 “민주노총 수호”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불공정’에 분노하는 청년들이 ‘불평등’에도 분노할 수 있어야 사회가 바뀐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각자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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