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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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칼럼
학명 선사(1867~1929)는 말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그럼에도 송구영신 행사는 되풀이된다. 안면도에서 강화도에서 묵은해를 배웅하고, 새해를 맞으러 정동진으로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우리네 삶에서 꿈이 싹틀 틈새를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서일 게다. 돌아보면 고단한 한해였다. 많은 국민이 체감 불황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부동산값까지 폭등해 사회 양극화 구조는 더 심해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미군기지 이전,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예년보다 더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 파문과 다단계 판매업체 제이유그룹 사건은 몇해 전 로또복권 광풍에서 대중적 모양새를 갖춘 사행 심리가 모습을 바꿔 꾸준히 확대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학교급식을 위태롭게 한 노로바이러스와 세 해 만에 다시 나타난 조류인플루엔자도 국민의 스트레스를 더했다. 남북관계마저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으로 냉각기에 들어갔다. 〈한겨레〉가 며칠 전 선정한 국내 10대 뉴스를 살펴봐도 기분 좋은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작은 ‘기적’들이 빛을 내는 법이다. 여전히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한 축을 이루는 ‘김밥 할머니들’이 그렇고, 백혈병 어린이 등을 위해 이름을 숨긴 채 30억원을 서슴없이 낸 서울 남대문시장 한 상인이 그렇다. 세계 정상에 우뚝 선 피겨요정 김연아(16)양과 수영 3관왕으로 아시아경기대회 최우수선수에 오른 박태환(17)군, 세계야구클래식에서 미국과 일본을 꺾은 한국 야구팀은 우리 젊은이들의 자존심이다. 졸업생을 미국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시켜 국내 유수 기업에 취업시킴으로써 지방대의 설움을 떨쳐낸 강릉대 전자공학과와 정규직·비정규직 노조를 통합한 한국자산관리공사 노조도 희망의 한 자락을 보여줬다. 일제에 강탈당한 지 93년 만에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과 국산화율 80%를 자랑하는 다목적 인공위성 아리랑2호는 우리 정체성과 저력을 재확인한다.이들을 다 합친 것 이상의 기적은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사회 서민과 중산층 그 자체다. 인간의 본질이 고난을 이겨내는 역량에 있듯이, 어떤 사회든 몸통을 이루는 서민과 중산층이 튼튼하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일부 계층의 빗나간 행태가 불거지고 사회 전반의 불신이 심해지는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 주력은 여전히 건강하다. 기적은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아끼고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곧 사랑과 의지가 필수적이다. 욕망을 극대화하는 경쟁 위주 풍조는 흔히 개인의 성품까지도 왜곡시킨다. 그렇다고 자신감을 잃지도 말고 후천성의지결핍증후군에 걸리지도 말자. 기적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2007년은 서기 1년처럼 첫날이 월요일로 시작된다. 새로운 원년이라고 생각하자. 굳이 문명서진론을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를 포함한 동·남 아시아 지역은 지금 전례없는 국운 상승기에 있다. 앞으로 10년은 지난 수십년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리나라로서는 수백년 만에 처음 맞은 기회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꿈은 난관 너머에 있고, 그것을 돌파함으로써 꿈은 기적으로 꽃핀다. 내년 이맘때 한해를 돌아보며 더 많은 기적을 꼽고 싶은 이들은 생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경구를 가슴에 새겨두자.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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