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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7 21:11 수정 : 2010.01.17 21:11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북한의 움직임이 혼란스럽다. 조선적십자중앙위원회가 남쪽의 옥수수 1만t 지원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한 지난 15일, 최고 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는 ‘거족적인 대남 보복성전’을 선포하는 성명을 내놨다. 전날에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금강산·개성 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접촉을, 11일에는 외무성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당사국 회담을 제안했다.

북쪽 기구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면, 국방위가 새 전술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전술은 지난해 여름 이후 북쪽이 보여준 일관된 방향성 아래 있다. 평화협정 논의 틀 마련과 남북관계 개선이 그것이다.

“애초 평화협정은 핵문제와 관계없이 자체의 고유한 필요성으로부터 이미 체결됐어야 했다. 한반도에 일찍이 공고한 평화체제가 수립됐다면 핵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1일 외무성 성명의 이런 주장은 나름의 진실을 내포한다. 정전체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현실이 정상일 수는 없으며, 냉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이 체결돼 이행됐더라면 핵문제가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쪽은 평화협정 논의를 ‘영변 이후’ 핵 협상 전략의 핵심으로 삼는다. 앞으로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쪽은 실질적인 핵 폐기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이 불능화한 영변 핵시설은 관련국들의 적극적 행동을 유도할 만한 카드가 되기 어렵다. 회담 재개와 더불어 그 이상의 협상이 이뤄져야 하는 상황에서 평화협정은 북한이 기댈 필수 카드가 될 수밖에 없다.

북쪽 처지에서 남북관계 개선은 아주 중요하다. 적어도 나쁜 남북관계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핵 협상과 평화협정 논의가 방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북쪽이 지난 몇달 동안 남쪽 정부의 의도적 무시를 감수하면서까지 관계 개선을 시도한 까닭이다.

북쪽의 이런 태도는 모두에게 좋은 기회다. 제대로 틀을 짠다면 20년 가까이 끌어온 핵 협상과 한반도 문제가 결정적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언뜻 보기에 북한은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내세우고 미국은 그 반대를 주장하지만 양쪽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북쪽은 이미 ‘6자회담과 병행해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을 할 수가 있다’고 했고, 미국도 이 제안을 어떤 식으로 수용할지 고심하고 있다. 미국이 ‘핵 없는 세계’ 구상 진전을 위한 중요 계기로 삼는 오는 5월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 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변수는 우리 정부다. 정부는 미국이 북쪽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고 있다. 여기에는 선핵폐기라는 기존 정책의 관성 외에 평화협정이라는 이슈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있는 현실, 이제까지 강경 대북정책이 성과를 보고 있으며 좀더 밀어붙이면 북쪽이 굴복하거나 붕괴할 거라는 자의적 정세 판단, 6월 지방선거를 앞둔 보수층 눈치보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김영삼 정부는 핵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경수로 제공 비용만 떠맡았으며, 뒤늦게 준비 없이 대북 쌀 지원에 나섰다가 오히려 남북 사이 갈등만 키웠다. 또 우리나라가 한반도 평화 문제를 주도한다고 선언했으나 어느 나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핵 협상과 평화협정 논의에서 핵심 구실을 해야 할 우리나라가 오히려 장애물이 됐던 것이다. 이런 ‘한국 문제’가 지금 비슷하게 되풀이될 조짐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북쪽의 대남 강경 움직임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후 진전된 남북관계를 바탕으로 평화협정 논의를 주도함으로써 북쪽의 핵 폐기 결단을 앞당기는 길을 찾아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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