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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03 19:35 수정 : 2010.08.03 19:35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회담을 위한 (6자)회담에는 관심이 없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나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어제 방한 일정을 마친 로버트 아인혼 미국 국무부 대북제재 조정관(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 겸임)의 말이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어느 미국 고위관리에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런 태도를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고 했다. 먼저 유화책을 내놓지 않고 북한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우선 한반도 정세가 계속 나빠지고 있다. 동·서해의 군사긴장에 더해 북한이 곧 3차 핵실험을 할 거라는 예상이 심심찮게 나온다. 한다면 지난해 2차 때보다 더 강력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근본 이유는 체제 유지와 정권 안보에 있고, 따라서 핵 능력 강화는 외부 압박에 정비례한다.

외교가 사실상 실종된 것도 큰 문제다. 전략적 인내의 바탕에는 북한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 있다. 그 중요한 수단이 경제봉쇄와 군사압박이다. 미국이 꼭 천안함 사건 때문에 한반도 주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건 아니다. 대북 추가제재 역시 북한 지도부의 돈줄을 겨냥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화가 들어설 여지가 아주 좁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미-중 갈등 또한 전략적 인내와 관련이 있다. 한반도 관련 사안을 놓고 협상이 이뤄질 때는 관련국들도 호흡을 맞추게 된다. 반면 대북 압박 국면에서는 중국은 중립적 태도를 취하거나 북한 쪽에 서기 쉽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중국 포위를 강화하는 듯한 현재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 행동과 관련해 두가지만을 상정한다. 대결과 굴복이 그것이다. 대결은 미국에도 부담이 되지만 북한의 굴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끌고갈 수 있다. 하지만 신뢰의 기반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북한은 굴복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전략적 인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은 이전에도 전략적 인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다. 미국은 많은 병력과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였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전략적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패 여부를 쉽게 단정하려 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장기인가? 적어도 몇년, 길게는 한 세대다. ‘기다려보면 좋아질 것’이라는 이런 태도는 무능력과 실패를 고백한 것과 같다. 지금의 전략적 인내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우리 정부가 말하는 ‘기다리는 전략’도 전략적 인내와 일맥상통하지만 차이는 있다. 북한붕괴론이 그것이다. 외교안보 고위관리들은 공공연하게 북한 급변사태를 언급하고, 통일부의 내년 예산에서 가장 크게 늘어난 항목도 그와 관련된 연구다. 미국에서도 북한 체제의 지속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미국 정부가 북한붕괴론에 기댈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전략적 인내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전략’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의 평화가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방법론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 막연한 낙관론 속에서 손을 놓고 있다. 인내라는 이름으로 사태 악화를 방치·조장하는 이런 무능력이 더 계속돼선 안 된다.

사람은 앞날을 내다보며 행동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예측전문가로 유명한 미국의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뉴욕대 교수는 상황을 예측하고 문제를 풀려면 행위자에 대한 가치판단보다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심인가, 일관성이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북한은 여기에 해당한다. 한반도 관련 사안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해법이 있다는 뜻이다. 지금 오히려 합리적 판단이 어려운 것은 미국과 한국 정부의 행동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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