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12 19:09
수정 : 2014.03.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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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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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는 무력이 충돌하는 열전(hot war)과 무력 사용 없이 경제·외교·정보 등을 활용해 맞서는 냉전(cold war)만 있는 게 아니다. 선전포고를 하거나 정규군을 동원하지 않은 채 누가 했는지도 모르게 사이버공격, 요인 암살, 테러 등을 하는 것은 그림자전쟁(shadow war)이다. 저강도전쟁도 이와 비슷하다. 요즘에는 첨단 디지털 무기로 정보망 등 선택된 목표물만을 공격하는 스마트전쟁(smart war)이 시도된다. 2차대전 초기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는 했으나 실제 전투는 하지 않았던 몇 개월은 가짜전쟁(phoney war)으로 불린다.
또 다른 전쟁도 있다. 지난달 하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면서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의 대립이 본격화한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령과의 전쟁(phantom war)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남쪽의 크림자치공화국에 러시아군이 진입하고 친러시아 민병대도 활동하지만 총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론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와 미국·유럽, 크림공화국과 러시아가 각각 한편이 돼 팽팽한 긴장을 이어간다. 스스로 상상하는 ‘상대의 악의’라는 유령이 바로 적이다.
크림공화국이 16일 실시하는 주민투표는 이 전쟁이 어디로 갈지를 가름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크림공화국이 이후 러시아 편입을 강행한다면 과도정부 쪽과의 충돌 위험은 물론이고 크림공화국 내 소수파인 우크라이나계 주민 등의 불안감은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이미 유령과의 전쟁 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유령과의 전쟁이 상승작용을 할 경우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1991년부터 4년 동안 계속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잘 보여준다. 수십만명의 사망자와 수백만명의 난민이 생겼고, 민족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과 2개 자치주로 이뤄졌던 유고는 결국 7개 나라로 쪼개졌다. 당시 그랬듯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외세는 유령과의 전쟁을 부추긴다. 강국들은 대개 가운데에 끼인 나라의 통합성보다는 분열·흡수를 통한 영향력 유지·강화를 추구한다.
이는 2차대전 이후 한반도와 주변국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령은 지금도 수시로 출몰한다. 남북한은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고 주변국들은 이를 빌미로 삼아 새로운 유령을 만드는 구도가 되풀이된다.
중국은 최근 ‘유령 사냥’에 부쩍 관심을 나타낸다. 정부 주요 인사들은 ‘중국의 문 앞에서 전쟁이나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북한과 한국·미국 모두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면서, 중국 쪽으로 탈북자가 대규모로 넘어오는 일이 없도록 북한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해나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한테 북한핵 문제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난제의 근원’이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2009년 2월부터 2013년 5월까지 정례 브리핑에서 다룬 주제 가운데 북한핵 문제(1050회)는 국제적 충돌(1098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신뢰는 유령과의 전쟁을 피해 나가는 핵심 수단이다. 우크라이나 안의 러시아계는 자신들이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거꾸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가 먼저 무력 공격을 할까 봐 두려워한다. 유령과 유령의 충돌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면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하지만 북한은 한국과 미국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비핵화 과정을 ‘언덕을 오르고 구덩이를 건너 정도를 걷는 것’에 비유했다. 구덩이가 바로 ‘신뢰 부족’이다.
해법은 대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잘 짜인 대화는 유령을 현실로 불러내 제거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외세와 거리를 두고 민주적 결정을 통해 나라의 통합성을 유지한다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다. 대화가 중단된 지난 몇 해 동안 북한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관련 사안들은 모두 악화했다. 중국 쪽 주장처럼 ‘대화를 안 하는 것보다는 어떤 대화라도 하는 게 낫고 어떤 대화라도 늦게 하는 것보다는 일찍 하는 게 낫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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