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06 19:19
수정 : 2016.06.06 19:19
책장 안쪽에 꽂혀 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꺼내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이 권위 있는 맨부커 국제상을 받은 데는 그만한 가치와 보편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우리에겐 친숙한 내용이어서 무심히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는 폭력, 아름다움, 생명력에 대한 얘기다. 세 연작소설 가운데 첫 번째인 ‘채식주의자’는 몸과 마음에 깊숙이 침투한 과거 폭력의 흔적이 육식을 거부하게 만드는 한 여성을 다룬다. 채식에 대한 선입견에 빠져 고기를 억지로 먹게 만들려는 가족들의 대응 또한 폭력적이다.
폭력의 이런 일상적인 구조는 멀리 군사독재 시절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가깝게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부터 밤늦게까지 과외에 붙들어매는 교육이 바로 그렇다. 열악한 노동환경이 만들어낸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 사고’, 강남 살인사건을 계기로 공론화한 ‘여성 혐오’ 역시 억압과 폭력이라는 뿌리를 갖는다. 국가가 학생들을 내팽개친 뒤 가족 등의 진상조사 요구조차 억누르는 세월호 사건은 ‘채식주의자’의 틀과 똑같다. 한·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최종 해결’을 선언한 뒤 관련 논의까지 봉쇄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육식의 거부는 폭력으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상흔의 표출이자 작은 저항일 뿐이다.
두 번째 소설 ‘몽고반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겐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아름다움은 사람에 대한 믿음의 근거이자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하지만 깊은 상흔은 아름다움의 표출을 쉴 새 없이 방해한다. 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아름다움은 왜곡되고 어느 순간 세상은 우리에게 심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공포마저 안겨준다.
세 번째 ‘나무 불꽃’은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이 책에는 나무에 대한 이미지가 넘쳐난다. 나무는 한자리에 묵묵히 서서 온갖 환경변화, 곧 모든 폭력에 맞선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낸다. ‘불꽃’으로 표현되는 나무의 생명력은 모든 폭력을 견뎌내는 근원적인 힘이다. 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나무를 형제라고 생각하고 나무가 되려 한다. 그 결과는? 실패다. 여기서도 폭력은 끈질기게 작용한다. 스스로를 초극하려는 시도조차 폭력적으로 거부되는 상황이 우리의 일상이다.
폭력이 없다고 해서 끝없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생명력을 발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폭력이 구조화한 사회에서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평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평화는 단순히 폭력의 반대말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를 바꾸고 실제로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1965년까지 진행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했다. 평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과 가족·학교·직장·단체 등 모든 차원을 포괄하며, 모든 영역에서 상위 가치가 돼야 한다. 평화의 정의와 기준, 평화의 방법론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꾸준히 소통하면 공통분모를 기초로 최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평화가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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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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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촌 어느 나라보다 평화를 키워나가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남북이 분단됐기에 더 그렇다. (초)강대국들 사이에 낀 지정학적인 위치로 볼 때도 한반도와 우리 사회의 평화는 필수다. 개발독재를 경험하고 불과 수십년 만에 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 역사는 평화 구축 노력에서도 새 모습을 보여줄 것을 압박한다. 우리의 미래는 ‘평화, 아름다움, 생명력’이라는 말로 그려져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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