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세상이 어지럽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 이후 늘 그랬지만 요즘 더하다. 지금의 최대 현안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실제로 이 두 사안은 역사의 큰 흐름에서 많은 것을 함축한다. 파시즘 성향의 대중선동가인 트럼프의 부상은 세계사의 세 가지 큰 사이클이 끝나는 교차점과 맞물린다. 첫째는 1970년대 말부터 지구촌 경제를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쇠퇴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변화를 강요받았으나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국제적 양극화와 금융자본의 횡포다. 트럼프는 인종주의를 활용해 이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흡수했다. 금융자본과 손잡고 부동산 재벌이 된 트럼프가 개혁적인 모습을 보일지는 의문이지만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둘째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미국 패권의 동요다. 조지 부시 공화당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뒤이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는 패권 질서의 점진적 재편을 꾀했다.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라는 이름으로 급진적 재편을 얘기한다. 그의 주장은 현실적이면서도 조악하다. 앞으로 지구촌 여러 곳에서 다극 구도의 양상이 이전보다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미국의 질서 있는 퇴각을 뜻하는 건 아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미국의 일방주의가 더 심해질 수 있다. 셋째는 200년 이상 지속된 서구 중심 질서의 퇴조다. 그 맞은편엔 아시아가 있다. 지금은 중국이 아시아의 부상을 대표하지만 인도의 덩치가 중국만큼 커지면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트럼프는 좌충우돌하며 이 거대한 전환 과정의 여러 양상을 미리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세 사이클의 전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이후 강대국의 각축장이 돼온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철저한 규명과 이후 과정은 당연히 이들 사이클과 조응하는 내용을 갖는다. 우선 ‘87년 체제’의 종언이다. 6·10 민주항쟁으로 성립된 87년 체제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정착시켰으나 ‘제왕적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권위주의, 지역주의, 정치 불신(또는 과잉) 등을 온존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는 이런 부정적 측면이 누적돼 있다. 87년 체제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하강과 호응한다. 이 체제가 글로벌 신자유주의 속에서 성립하고 그와 더불어 굴러왔기 때문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진단처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지난 50여년 동안 작동해온 ‘박정희 패러다임’의 파탄이기도 하다. 곧 ‘박정희-박근혜 체제’라는 장기 사이클이 밑바닥에 이르렀다. 이 체제의 핵심은 국가-재벌 동맹이 노동과 시민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이 체제가 작동돼온 배경에는 강고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있다. 미국의 패권이 이 체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미국 패권의 동요는 이 체제의 몰락과 연동된다. 근대 초기 이후 지속돼온 외세(특히 미국과 일본) 의존 구조는 최근 상황의 배경을 이루는 더 긴 사이클이다. 이 구조는 서구 중심 질서의 동요와 맞물려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부쩍 심해진 대미 외교·안보 종속이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등을 통해 시도하려는 친일·독재 정당화 등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세계사와 우리 근현대사가 맞물린 세 가지 장기 사이클을 순조롭게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수십년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첫째는 낡은 체제의 철저한 청산이다. 둘째는 새 사이클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도록 시민혁명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다. 이번 게이트를 통해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치·경제·사법·교육·문화 등 각 부문의 개혁과 개헌을 포함한 전면적인 재정비를 이뤄내야 한다. 시민혁명은 쉽지 않다. 첫 고비는 박 대통령의 퇴진이다. 이후에도 누가,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개혁을 밀고 갈지를 놓고 여러 난관과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인식과 연대 정신이 중요하다. 촛불시위로 표현되는 국민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동력의 근원이다. 당장은 첫 고비를 제대로 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길게 내다보되 차근차근 나아갈 때다. jkim@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칼럼 |
[김지석 칼럼] 아직 첫 고비도 못 넘은 ‘시민혁명’ |
논설위원 세상이 어지럽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 이후 늘 그랬지만 요즘 더하다. 지금의 최대 현안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실제로 이 두 사안은 역사의 큰 흐름에서 많은 것을 함축한다. 파시즘 성향의 대중선동가인 트럼프의 부상은 세계사의 세 가지 큰 사이클이 끝나는 교차점과 맞물린다. 첫째는 1970년대 말부터 지구촌 경제를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쇠퇴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변화를 강요받았으나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국제적 양극화와 금융자본의 횡포다. 트럼프는 인종주의를 활용해 이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흡수했다. 금융자본과 손잡고 부동산 재벌이 된 트럼프가 개혁적인 모습을 보일지는 의문이지만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둘째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미국 패권의 동요다. 조지 부시 공화당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뒤이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는 패권 질서의 점진적 재편을 꾀했다.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라는 이름으로 급진적 재편을 얘기한다. 그의 주장은 현실적이면서도 조악하다. 앞으로 지구촌 여러 곳에서 다극 구도의 양상이 이전보다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미국의 질서 있는 퇴각을 뜻하는 건 아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미국의 일방주의가 더 심해질 수 있다. 셋째는 200년 이상 지속된 서구 중심 질서의 퇴조다. 그 맞은편엔 아시아가 있다. 지금은 중국이 아시아의 부상을 대표하지만 인도의 덩치가 중국만큼 커지면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트럼프는 좌충우돌하며 이 거대한 전환 과정의 여러 양상을 미리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세 사이클의 전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이후 강대국의 각축장이 돼온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철저한 규명과 이후 과정은 당연히 이들 사이클과 조응하는 내용을 갖는다. 우선 ‘87년 체제’의 종언이다. 6·10 민주항쟁으로 성립된 87년 체제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정착시켰으나 ‘제왕적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권위주의, 지역주의, 정치 불신(또는 과잉) 등을 온존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는 이런 부정적 측면이 누적돼 있다. 87년 체제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하강과 호응한다. 이 체제가 글로벌 신자유주의 속에서 성립하고 그와 더불어 굴러왔기 때문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진단처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지난 50여년 동안 작동해온 ‘박정희 패러다임’의 파탄이기도 하다. 곧 ‘박정희-박근혜 체제’라는 장기 사이클이 밑바닥에 이르렀다. 이 체제의 핵심은 국가-재벌 동맹이 노동과 시민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이 체제가 작동돼온 배경에는 강고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있다. 미국의 패권이 이 체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미국 패권의 동요는 이 체제의 몰락과 연동된다. 근대 초기 이후 지속돼온 외세(특히 미국과 일본) 의존 구조는 최근 상황의 배경을 이루는 더 긴 사이클이다. 이 구조는 서구 중심 질서의 동요와 맞물려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부쩍 심해진 대미 외교·안보 종속이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등을 통해 시도하려는 친일·독재 정당화 등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세계사와 우리 근현대사가 맞물린 세 가지 장기 사이클을 순조롭게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수십년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첫째는 낡은 체제의 철저한 청산이다. 둘째는 새 사이클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도록 시민혁명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다. 이번 게이트를 통해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치·경제·사법·교육·문화 등 각 부문의 개혁과 개헌을 포함한 전면적인 재정비를 이뤄내야 한다. 시민혁명은 쉽지 않다. 첫 고비는 박 대통령의 퇴진이다. 이후에도 누가,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개혁을 밀고 갈지를 놓고 여러 난관과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인식과 연대 정신이 중요하다. 촛불시위로 표현되는 국민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동력의 근원이다. 당장은 첫 고비를 제대로 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길게 내다보되 차근차근 나아갈 때다. jkim@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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